학계 주목 나주 오량동 유적지 땔감 공급 어려움 있었을 곳

다른 곳에 옹관 만들던 초대형 가마 숨어 있을수도..

시종면 내동리에서 발굴된 옹관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67년 9월 16일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은 시종면 내동리 초분골 뒷산에서 고분을 발굴하고 있었다. 채병서 교수와 10여명의 경희대 사학과 학생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왠만한 고분은 도굴이 심해서 이들이 발굴중이던 7호 고분도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었다. 한참 발굴이 진행중이던 조사자의 삽 끝에서 눈에 익은 토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옹관(甕棺)이었다. 옹관은 토기로 만든 관(棺)을 말한다. 옹관은 이미 우리나라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 터여서 당시에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십기가 전시될 정도였다.

그러나 옹관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내려 가던 연구원들은 끝이 보이지 않은 옹관의 규모에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까지 발견된 옹관의 규모는 커 봐야 길이가 1m 정도가 전부였다.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것들도 그랬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온 옹관의 크기는 길이가 3.15m나 됐고 직경이 95cm나 됐다.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크기의 옹관이 10여개나 발견됐다. 각각의 옹관은 아가리를 맞댄 채 한 세트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대고고연구학과 김원룡 교수는 “옹관은 과거에도 많이 발굴됐지만 이번에 발굴된 옹관군은 보통것과는 비교가 세배 이상 크다는 점에서 큰 관심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초대형 옹관은 그 이후로도 영암을 비롯한 영산강 유역 고분에서 지속적으로 발굴돼 나왔다. 모두 3~6 세기 경에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었다.

1996년 나주 복암리에서 발굴된 옹관의 크기는 최대 2.7m에 달했고, 영산강 건너 무안 구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옹관은 총 길이가 무려 4.16m에 이른다. 이러한 초대형 옹관들이 영산강 유역에서만 수없이 발견됐고 발굴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영산강 유역의 독무덤은 다른 지방의 고분들과는 달리 독자성이 뚜렷하고 고도의 토기 제작기술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특수한 대형의 전용(專用) 옹관을 주된 매장시설로 하고 있어 백제의 지방토착세력 및 마한 토착집단과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정도 규모의 옹관은 고도의 토기 제작술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는 역사학계의 지적이다.

그럼 이런 초대형 옹관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을까. 자료에 따르면 길이 2m 이상의 대형 옹관은 하나의 무게가 400~600㎏에 달한다. 엄청난 무게가 아닐 수 없다.

또 영산강 일대에서 발견된 옹관들은 표면이 셈세하고 두께 또한 15㎝로 구연부와 동체부 두께가 일정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지금으로부터 1천500여년전의 사람들이 황토를 이용해 일정한 두깨를 가진 600㎏의 옹관을 만든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도예가들의 가장 큰 고민중의 하나는 균등한 두께를 가진 도자기를 굽는 것이다. 가마 내부조건이 조금만 비틀어져도 균등한 도자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옹관을 만든 사람들은 완벽에 가까운 토기제작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은 깨지기 쉬운 초대형 항아리를 매장하는 곳으로 옮겨서 역시 안전하게 매장하는 기술 또한 그들은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 옹관을 무덤 주변에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옹관을 도대체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구워냈을까?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지금까지 대형 옹관의 제작 기법에 대해 대해 학계가 알아낸 것은 두 가지 정도다.

구운 온도가 800-900도 정도로 다른 토기나 도기류에 비해 소성(燒成) 온도가 낮은 편이며 사립(沙砬) 즉, 모래 성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지난 2001년 나주시 오량동 유적지에서 발견된 가마터는 옹관을 구웠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다가 2001년 여름 나주시 오량동에서 분묘를 조성하다가 옹관을 굽는 가마로 추정되는 유적이 대량 불굴되면서 옹관제작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것으로 보였다.

오량동 산 27번지 일대 속칭 우두머리산이라는 해발 20m 가량 되는 언덕에서 대형옹관을 구운 가마터 흔적들이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뒤 동신대박물관과 목포대박물관이 긴급 수습 조사를 벌여 가마터 15기를 발굴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오량동 유적은 2004년 8월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이 옹관 가마라는 데는 이견이 적지 않았다. 가마 내부에서 무수한 옹관 조각들이 발견되기는 해도, 그것은 이곳에서 굽던 옹관이 깨진 흔적이라기보다는 가마를 쌓는 데 활용했던 일종의 건축 재료라는 반박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더불어 옹관 가마 반대론자들은 오량동 가마는 최대 2m 가량이나 되는 옹관을 굽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다는 반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 완형이 발견되지 않아 이곳이 옹관을 굽는 장소로 확증받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대형 옹관들이 자리잡기에는 가마는 폭도 작은 편이고 높이도 낮은 편이다.

오량동 유적에 대해서는 지금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연구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

여기에 몇가지 필자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오량동 유적이 토기를 굽는 전반적인 지리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고대에 토기나 도기를 굽기 위해서는 흔히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게 정설이다.

첫째는 좋은 흙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토기나 도기를 구울 땔감이 풍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는 만든 토기를 다른 곳으로 옮길수 있는 해운항로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강진군의 청자도요지나 해남의 녹청자요지등은 모두 이같은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일단 오량동 유적은 영산강 변에 있기 때문에 옹관을 제작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는 좋은 곳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최대 600㎏에 달하는 옹관을 옮기기 위해서는 강변이나 바닷가에 가마를 두는게 필수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또 이 일대 토질도 좋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오량동 김남기 통장은 “마을앞 토질이 매우 좋다. 곳곳에 진흙이 있는데 토기를 만들기에 적당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가지 빈약한 것은 오량동유적 주변에 땔감이 풍부한 자연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을 뒷산이 해발 150m 안팍의 야산인데다 산세도 약하다. 인근 동수오량농공단지가 예전에는 산이었다고 하지만 모두 야산이어서 토기를 굽는데 소요되는 엄청난 땔감을 댈만한 산은 되지 못할 것으로 판단된다.

영산강 건너편에 신걸산과 금성산 자락이 있지만 높이가 해발 300m 안팎이고, 오량유적지와는 거리가 먼데다 땔감을 해서 강을 넘어와야 해 적절한 땔감 공급지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오량동 유적의 가마터는 어디에서 땔감을 가지고 왔을까. 영산강 뱃깃을 이용해 서남해안 곳곳의 지역에서 조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옹관을 굽는 곳은 따로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월출산 아래 어디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길이 2m 이상, 하나의 무게가 400~600㎏ 달했던 초대형 옹관을 만들었던 장소가 갈수록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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