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개 성씨 영암에 거주...본 수만 278개 달해

본지 새해부터 ‘영암의 성씨 기행’ 연재

영암향교 대성전-영암의 성씨 중에 본이 가장 많은 곳은 김씨이며, 그중에 김해김씨가 1천636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집계됐다. 사진은 영암읍 소재 영암향교 대성전.
우리 영암군에는 성씨가 몇 개나 될까. 1998년 편찬된 영암군지 자료에 따르면 영암군에는 91개 성씨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성씨는 91개 였지만 본의 수는 278개에 달했다. 지난 14년 동안 인구이동이 많았기 때문에 성씨의 숫자는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를 반복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약 258개 성씨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영암에서 우리나라 전체 성씨의 약 30% 정도가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258개의 성씨는 중국의 10분의 1수준이다. 일본에는 10만여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암의 성씨중에 본이 가장 많은 곳은 김씨였다. 영암에 살고 있는 김씨의 본은 31개였다. 김씨에 가장 많은 가구를 가지고 있는 성은 김해김씨로 1천636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또 광산김씨와 경주김씨가 각각 841가구, 417가구로 그 뒤를 이었다.

다음으로 본이 많은 성은 이씨였다. 본이 18개였는데, 가장 많은 가구수는 전주이씨로 843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뒤를 경주이씨와 함평이씨가 각각 602가구와 292가구를 차지했다.

임씨와 최씨, 박씨도 많았다. 임씨는 본이 14개였고 최씨는 본이 13개, 박씨는 11개 였다.

전체적인 가구수로는 김씨가 압도적이었다. 전체 가구수가 3천607가구에 달했다. 그 다음으로 이씨가 2천293가구 였으며, 박씨가 2천198가구였다. 이어 최씨가 1천575가구, 정씨가 762가구, 임씨가 402가구, 조씨가 316가구, 전씨가 314가구 순이었다.

재미있는 수치도 많았다. 단일 본인 신창표씨는 영암에 단 두가구가 살고 있었고, 진수 진씨도 4가구에 불과했다. 김해 해씨도 아홉가구가 살고 있는 것에 그쳤고, 복주 진씨와 여양 진씨도 각각 8가구와 16가구가 살고 있을 뿐이었다. 영암의 성씨를 집계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희성들의 분포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특이한 것은 영암군지에 조사된 자료에 영암을 본으로 한 성씨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암이 본인 성씨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군단위 지역이 그 지역을 본으로 하는 성씨를 가지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대신 영암 주변지역을 본으로 한 성씨는 여럿 발견됐다. 가나다 순으로 파악해 보면 우선 장흥고씨가 29가구 살고 있고, 해남 곽씨가 24가구였다. 또 나주 김씨가 51가구, 도강(강진)김씨가 27가구가 조사됐다.

나주 나씨가 192가구로 상당한 규모를 형성하고 있었고, 함평노씨가 85가구, 남평 문씨가 310가구, 무안 박씨가 189가구, 탐진 안씨가 28가구, 나주 오씨가 3가구, 함평 오씨가 12가구, 해남 윤씨가 97가구, 함평 이씨 292가구, 장흥 임씨 71가구, 나주 임씨 66가구, 장흥위씨 14가구, 나주 전씨 6가구, 무안 정씨 15가구, 함평 조씨 21가구, 나주 주씨 11가구, 탐진최씨 226가구등이었다.

이웃 강진이나 해남, 장흥, 무안, 함평, 나주등의 본을 가진 성은 많았지만 영암을 본으로 하는 성씨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영암군지는 또 영암에서 살고 있는 50세대 이상 성씨의 유래를 소개한다며 43개 성을 뽑아 설명하고 있다. 진주강씨와 제주고씨 현풍 곽씨등 순으로 가나다 순으로 배열을 해서 성씨가 우리나라에서 자라잡게된 배경이 개괄적으로 설명돼 있다.

그러나 각 성을 소개한 부분이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내용일 뿐이여서 이들이 어떻게 영암에 정착했고, 영암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따라 <영암신문>은 새해에 영암의 성씨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획특집시리즈를 게재한다. 영암에 거주하고 있는 성씨를 중심으로 그들의 후손들을 만나보고 조상들의 묘소와 제각등도 취재할 예정이다. 각 성씨의 후손들이 오늘날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주요한 기사내용이 될 것이다.

1998년 발행된 영암군지에 따르면 우니라라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신라하대까지 왕실과 중앙의 귀족이 성과 본관을 갖게 되었고, 지배층 일반에게서 성과 본관체계가 확립된 것은 고려초기였다.

그러다가 고려말기에 이르기까지 양민층에 점차 성씨가 보급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이르러 신분의 상승과 해방으로 말미암아 천인층까지 성씨를 가질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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