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유역에만 있는 독특한 일본계 무덤양식

한국인, 일본인, 마한인, 귀화일본인, 마한의 망명객 등 주장 다양

영산강 주변 다른 고분들과 연계 검토 열쇠될 듯

시종 태간리 자라봉고문의 석실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 형태인 전방후원분은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친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조성된 독특한 형태의 무덤이다. 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분이라고 불렀으며 일본 용어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이 무덤은 1983년까지 오직 일본에만 있는 무덤으로 통용됐다. 우리나라에서 이 무덤이 발견된다는 것은 일본이 한반도 지배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당시 역사학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학계에서 전방후원분이 처음 보고된 것은 1972년이었다. 모 일간지에 당시 고려대 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세영이 ‘한국속의 전방후원분’이란 제목으로 기고문을 실었다. 당시 주장으로 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긴급히 문화재위원회까지 열렸다.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친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조성된 독특한 형태의 무덤. 당시 최고권력자인 왕이나 지역의 유력자인 수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역대 일왕의 무덤은 모두 이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강점기인 1938년 나주 반남면 신촌리 6호분, 덕산리 2호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하다고 보고된 적이 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아무도 그 주장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인 장고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방후원분인 오사카시 닌토쿠 청황의 릉
고고학자 조유전 박사는 2003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70년대 초 장고봉의 존재를 주장했을 때 고고학계가 자지러졌다”고 표현했다. 문화재위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한마디로 수긍할 수 없다고 일축했고 발굴조사의 필요성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다가 강인구 영남대학교 교수가 1983년 6월 영남대학신문에 ‘함안-고성지방 전방후원분의 발견과 의의’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 부분이 어느정도 공식화 됐다. 강교수는 91년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분 발굴을 책임졌던 학자였다.

강교수가 소개한 대표적인 장고분은 경남 고성의 무기산 고분, 전남 나주의 신촌리 6호분, 경남 함안의 말이산 16·22호분, 경북 고령의 본관동 고분이었다. 강교수는 일본 고유형식으로 알려져 있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가 발전한 것이란 주장을 폈다.

강교수가 91년도에 발굴한 자라봉고분을 4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 것도 자라봉고분의 조성시기를 앞으로 끌어올려 우리나라에 있는 장고분을 일본의 그것에 앞선 것으로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또 한가지 특이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80년대 ‘장고분’ 논쟁을 주도했던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99년부터 3차례에 걸쳐 실시된 동아대 박물관 발굴결과 ‘장고형이 아님’이라는 최종 판정을 받았다. 이미 70년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충남 부여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진 바 있다.

그후 시종면 자라봉 고분을 필두로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명화동 고분 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장고형고분으로 확인됐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인 것이다.

결국 ‘장고형 고분’에 대한 연구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두가지였다. 이 무덤의 기원(起源)이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는 것과 그렇다면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한국인(마한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향후 한·일 고대사 문제에서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수수께끼인 것이다.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이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즉 약 100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린 묘제라는 점.

또 영산강 유역에서 겨우 13기만이 조사됐다. 반면 일본엔 2,000여기나 확인 조사됐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6세기 후반까지다. 결국 이 장고형 고분은 조사된 무덤의 수나, 조성시기를 살펴보면 일본 쪽이 앞선다는 뜻이다.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의 등고선
그렇다면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문제는 ‘정서상’ ‘민족감정상’ 한·일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앞으로도 달굴, 숙명의 논쟁거리였다.


우선 한국인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영산강 유역에서 살았던 마한 토착세력의 수장이라는 것이다. 이 ‘토착세력설’ 주장도 여러가지이다. ①당시 마한지역은 백제의 완전한 세력권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한은 백제·신라·가야·왜(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편다.

그런데 이 영산강 유역 수장들이 왜(일본 규슈지방)와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무덤인 장고분을 썼다는 주장이 있다.

②또 하나는 마한세력이 백제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규슈지방도 일본의 중앙세력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영산강 유역의 호족세력이 이런 규슈세력과 교류하면서 규슈의 묘제인 장고분을 썼다는 설도 있다.

③다른 견해도 있다. 백제가 영역을 넓히는 가운데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을 압박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동안 왜와의 왕래를 통해 ‘전방후원분’을 본 마한세력이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왜의 묘제를 썼다는 주장인 것이다.


일본인이라는 설도 있다. ①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②일본 연구자들 가운데는 왜 계통의 사람들이 영산강 유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중 일부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이 무덤은 백제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관료라는 주장이다.

마한의 망명객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마한 등에서 넘어간 한반도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와 가야사람들이 뭉쳐 야마토 정권을 세운다.

전남지역 전방후원분 분포지도
그 격변기에서 북규슈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의 이주민들이 망명객의 신분으로 다시 고향인 전남지방으로 건너왔으며 이때 일본의 장고형 고분을 썼다는 것이다.


무덤 주인공은 일본에서 귀환한 ‘마한인’의 것이란 주장이 있다. 한반도에서 주구묘를 썼던 전남지방의 마한세력 중 일부가 왜로 이주했다.

그런데 왜로 넘어간 마한 이주민의 후예들이 다시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걸쳐 원래의 고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돌아온다. 이 무덤은 그때 쓰여진 것이라는 것이다<조유전. 경향신문 2003년 7월 28일자 참조>.


이같은 팽팽한 주장속에 한가지 참고해야 할 것은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과 영산강 유역 다른 고분들의 출토물을 비교 분석해 보는 것이다.

다시말해 전방후원분을 전방후원분만을 독립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영산강 유역에 산재해 있는 다른 고분들과 비교분석해 봄으로써 우리는 1천500년전 영암을 비롯한 영산강 유역의 역사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곳으로 가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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