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도요지는 소라면과 율촌면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분청사기 가마터는 소라면 사곡리와 분계동에 분포한다. 백자 가마터는 율촌면 가장리 가장저수지 인근 지역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현재 여수에서 추정되는 가마터는 분청사기 가마터 4개소, 백자 가마터 6개소 총 10개소가 알려졌다. 여수지역은 신석기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적지 않은 도자역사를 자랑한다. 신석기 시대 토기로는 당시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나뭇잎 토기들이 발견돼 상당한 실력을 갖춘 전문 도공들이 생활했을 가능성이 크다. 청동기 시대의 많은 고인돌을 비롯해 삼국시대에는 백제 토기를 비롯해 소가야, 대가야의 토기도 같이 발견되고 있다. 여수시 화장동 선사유적공원 내에 통일신라시대의 기와 가마터가 자리 잡고 있다. 통일신라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 영암군민의 의식성장이 동력이었다영암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난 것은 일본인들이 다른 지역에서 보다 영암에서 높은 비율의 농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높은 소작율과 빈번한 소작권이동으로 군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군민들의 생활은 아사지경이었다. 여기에 3.1운동이후 청년회활동, 신간회활동, 소작인회 활동, 영암공산주의협의회 활동 등으로 영암군민들의 반일사상이 고조되고, 반봉건적 啓蒙意識이 꾸준히 성장하였던 결과라 할 수 있다. ■ 청년회의 활동영암군민들의 의식성장을 주도한 계층은 영암청년회라 할 수 있다. 영암청년회가 공식적으로는 언제 발족하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3.1운동의 경우를 보더라도 영암읍에서는 조극환을, 구림에서는 박규상을 중심으로 많은 보통학교학생들이 참여하였다
■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은 조선민족 말살과 경제수탈을 목표로 하였고, 경제수탈을 목표로 하는 정책은 그 중점이 농업정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농업정책을 실행해 나가는 주역은 조선총독부의 권력과 함께 조선농업을 변질시킨 일본자본이었다.한일강제병합 전부터 진출한 일본자본은 낮은 지가와 고율의 소작료, 그리고 개발의 잠재성을 노리고 진출한 “약탈적인 고리대 상업적인 중소 개인자본” 이었다. 일본인 久間健一 (1933년 총독부소작관역임)은 조선재래의 농촌사회가 왜래적인 권력과 자본에 의해 개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농민에게 축복이 아니라 불행이라 보았다.(구간건일, 조선농업의 근대적 양상, 2P, 조선 농업정책의 과제, 71P) 농업정책의 측면에서 일제 식민통
영암구림도기의 시작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보다 앞서 생산된 것이 옹관이다. 영암의 곳곳에서도 옹관이 발견되고 있다. 당시 입이 넓은 큰 항아리에 시신을 넣어 매장하는 옹관묘 장례풍습은 신석기 시대부터 서해안일대에서 상당히 많은 양이 분포했다. 특히 3세기~5세기 중반까지는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성행했다. 옹관문화가 알려진 것은 지난 1960년 시종면 내동리 고분에서 대형 옹관이 발굴되면서 나타났다. 크기가 대형화 되고 집단화를 이루면서 대량생산된 것을 추축하게 만든다. 이런 옹관의 흔적은 영암도기박물관에도 남아있다. 삼호읍 용암리에서 출토된 U자형 옹관은 2개가 1조를 이루는 함구식 옹관으로 마한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런 옹관으로 볼 때 옹관을 통해 당시의 토기의 기술을 알수 있
"일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아라" "사음(舍音, 마름)의 횡포를 지양하라""일인은 이 땅에서 물러나라"1932년 6월 4일(음력 5월 1일). 일제 치하에서 영암청년 70여명이 덕진면 영보리 형제봉에 모여서 노동절기념식을 갖고 있었다. 이날, 일본인 등의 농민수탈에 항거하는 시위 중에 거센 함성이 형제봉을 메아리쳤다. 기념식에서 최판옥과 김판권이 당시의 일반 정세를 강연하고,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이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적기를 선두로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행렬은 소작권을 새로 받은 소작인의 집에 이르러 소작권 이동의 부당성을 성토하기도 했다.이날 영암농민 투쟁사건은 전남운동협의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등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일제는 영
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농촌마을에 희망과 발전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안고 영암 곳곳에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는 주민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담고자 마을을 찾아 나서본다.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간간히 뿌리는 눈을 보며 겨울임을 실감하게 된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 12일 덕진면 영보리 냉천동마을을 찾았다. 냉천동마을은 영보풍향제가 열리는 영보정에서 덕진면 방면으로 도로를 따라 2~3㎞를 가다보면 우측에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을 따라서 1㎞정도 들어가다보면 대나무숲이 우거진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온다. 바로 이곳이 냉천동마을이다.냉천동마을의 지명은 영암문화원의 '영암의 땅이름' 책자에 따르면 마을에 참새가 많았다고 하여 참새골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을앞 공동식수가 유별나게
영암과 강진, 장흥은 같은 국회의원 선거구이다. 세 지역은 지금 어떤 변화를 겪고 있을까. 세지역의 장단점을 비교해서 장점을 서로 베치마킹 하는 것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의미있는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전반적인 여론과 평가들을 종합해 보면 세 지역은 뚜렷한 개성들을 가지고 있다.우선 잘하고 있는 분야부터 살펴보면, 영암은 지역 대표 농산물을 잘 육성하고 있는 것으로 주변지역사람들이 높게 평가한다. 쌀은 모든 지역에서 육성하는 분야기 때문에 평가대상에서 제외하면, 영암은 무화과와 대봉감이 지역 대표농산물로 뿌리내려 있다.지난해 영암지역에서 무화과로 올린 매출이 35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무화과는 주로 영암의 서부지역에서 집중 재배하고 있다. 무화과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
삼호읍 난전리 대불하수처리장내 유휴부지에 연간 876㎾ 규모의 전력생산이 가능한 신재생에너지단지가 준공하고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이 단지는 지난 2010년 지방보급 공모사업에 선정돼 총사업비 27억원중 13억 5천만원을 지원받아 이뤄진 사업으로 750㎾ 규모의 풍력시설과 126㎾ 규모의 태양광 시설을 갖춰 전력 생산을 통해 연간 2억여 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게 됐다.이번에 준공된 신재생에너지 단지에는 크게 태양열발전 설비와 풍력발전설비 2가지로 나눠져있다. 태양광발전설비는 개당 400W정도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4m정도 너비의 태양전지판이 120여개가 연결돼 있어 낮시간 중에서 4~6시간정도 가동을 하고 있다. 햇빛이 강하게 드는 봄이나 가을철에
우리 영암군에는 성씨가 몇 개나 될까. 1998년 편찬된 영암군지 자료에 따르면 영암군에는 91개 성씨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성씨는 91개 였지만 본의 수는 278개에 달했다. 지난 14년 동안 인구이동이 많았기 때문에 성씨의 숫자는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를 반복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우리나라에는 약 258개 성씨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영암에서 우리나라 전체 성씨의 약 30% 정도가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258개의 성씨는 중국의 10분의 1수준이다. 일본에는 10만여개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암의 성씨중에 본이 가장 많은 곳은 김씨였다. 영암에 살고 있는 김씨의 본은 31개였다. 김씨에 가장 많은 가구를 가지고 있는 성은 김해김씨로 1천636가구가 거주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덕진면의 산자락 곳곳에는 내린 눈이 남아 하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가운데 9일 덕진면 노송1구 노노동마을을 찾았다. 노노동 마을은 영보풍향제가 열리는 영보정에서 금정면 방면으로 약 1㎞정도를 가다보면 우측에 마을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표지석으로부터 약 500m 가량을 차량으로 더 이동하자 오래돼 보이는 마을회관과 정자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마을회관안에는 마을주민들이 모여 간단한 과자를 함께 나눠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갑작스런 낯선 사람의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반갑게 맞으며 마을에 대한 소개를 상세히 알려주었다.마을주민 양삼례 씨는 "우리마을은 마을 뒤로는 천지봉과 앞쪽으로는 넓은 논밭이 펼쳐져
1967년 9월 16일 경희대학교 박물관팀은 시종면 내동리 초분골 뒷산에서 고분을 발굴하고 있었다. 채병서 교수와 10여명의 경희대 사학과 학생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왠만한 고분은 도굴이 심해서 이들이 발굴중이던 7호 고분도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었다. 한참 발굴이 진행중이던 조사자의 삽 끝에서 눈에 익은 토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옹관(甕棺)이었다. 옹관은 토기로 만든 관(棺)을 말한다. 옹관은 이미 우리나라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 터여서 당시에도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십기가 전시될 정도였다.그러나 옹관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내려 가던 연구원들은 끝이 보이지 않은 옹관의 규모에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까지 발견된 옹관의 규모는 커 봐야 길이가 1m 정도가 전부였다. 중앙박물관에 전시
이번에 고대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에서 50여개의 하니와란 일본식 토기가 나온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종면 옥야리 산 159-2번지에는 장동방대형고분이라 이름 붙여진 큰 무덤이 있다. 방대형고분이란 아랫부분을 정사각형에 가깝게 모양을 잡아 위쪽으로 쌓아가는 기법의 고분을 말한다.2010년 10월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에서도 분구와 고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에서 하니와(고분 내외부에 열 지어 세워놓는 의식용 토기)로 불리는 원통형 토기가 다량 출토됐다. 학자들은 장동방대형고분의 조성연대를 6세기로 보고 있다. 6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는 태간리 자라봉고분과 조성연대가 비슷한 것이다. 이는 시종면 일대가 6세기를 전후해서 어떤 형태로든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 형태인 전방후원분은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친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에 조성된 독특한 형태의 무덤이다. 장고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고분이라고 불렀으며 일본 용어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이 무덤은 1983년까지 오직 일본에만 있는 무덤으로 통용됐다. 우리나라에서 이 무덤이 발견된다는 것은 일본이 한반도 지배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당시 역사학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우리학계에서 전방후원분이 처음 보고된 것은 1972년이었다. 모 일간지에 당시 고려대 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세영이 ‘한국속의 전방후원분’이란 제목으로 기고문을 실었다. 당시 주장으로 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긴급히 문화재위원회까지 열렸다. 서기 3세
23일 2차 발굴조사 결과가 나온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은 지난 91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었다. 그러나 자라봉고분은 20여년 동안 땅속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그 이유중의 하나는 전방후원분이 전형적인 왜식(倭式) 고분양식이기 때문이었다. 또 이곳에서 왜식 토기가 출토돼 이 무덤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라일본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학계의 우려가 컸다.80년대 초반부터 영산강 주변에서 10기 이상이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은 4세기 후반부터 6세기후반까지 일본이 영산강 일대를 지배한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학자들은 전방후원분이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대고분 발굴 발표현장에 갈때마다 궁금한게 한가지 있다. 왠만하면 한문이나 현대말로 풀어쓰는 문화재 용어중에 ‘하니와’란 일본말이 등장하는게 그것이다. 한일 역사학계가 자신들의 우월성을 치열하게 주장하는 대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니와라는 일본말은 우리 역사학계에서 마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듯 하다.지난 23일 시종면 태간리 현장에서 열린 자라봉고분 발굴현장에서도 그랬다. 발표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하니와(埴輪)란 50여점의 일본식 토기였다. 붉은 빛을 띠면서 마치 빗살무늬토기 모양을 하고 있지만 중간에 턱 처럼 생긴 띠(돌대)가 두 개씩 있는게 하니와의 큰 특징이다. 다시말해 무덤의 주인공은 6세기경 하니와라는 일본식토기를 사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하니와
대불산단 대부분의 중소업체들이 조선블럭을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지만 독자적인 기술을 가지고 대형 플랜트산업에 뛰어든 업체들도 있다.지난 2001년 창립한 대불산단내 (주)한영산업은 초창기 100억원이던 매출액이 2009년에 600억원으로 상승한데 이어, 올해는 1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400억원이 뛰어오른 것이다.자체인원 65명(협력사 포함 300명)의 중소기업이 이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플랜트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이 회사는 대형 조선블럭을 생산하면서 한편으로 해양구조물 접안설비와 강구조물 제작및 설치, 초대형 크레인 제작등의 기술을 축척해 왔다. 초창기 투자비용이 막대하지만 일단 자리 잡으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
선박부품업체 (유)성문 선박부품을 생산하는 대불산단내 (유)성문(대표이사 이재홍)은 2009년도 직원이 4명에 불과했다. 생산액은 연간 2억5천만원이었다. 공장도 작은 규모의 임대공장에서 세를 살았다.그러다가 지난해 이 회사의 인원은 지난해 9명으로 늘었고 생산액도 9억4천9백원으로 폭증했다. (유)성문의 성장은 눈부시다. 올해 7월 임대공장 신세를 면하고 500평 규모의 새 공장으로 이사를 했고 직원은 50명이 됐다. 올 생산 계획은 20억으로 잡고 있고, 내년도 생산액은 80억원으로 목표를 세웠다.이처럼 (유)성문이 급성장을 하고 있는 배경에는 클러스터 활동을 통한 지속적인 기술개발이 자리 잡고 있다.중소기업의 가장 큰 취약점은 기술개발 비용이 없다는 것. 조
다음은 지난 2일 목포신안비치호텔에서 전남도와 한국산업단지공단이 공동주최한 ‘한국해양산업 육성 정책포럼’의 요지이다. 이날 정책포럼은 앞으로 대불산단이 추구해야 할 업종다변화와 관련해 우리 영암지역이 관심을 많이 기울여야할 내용이 많았다.■ 해양스포츠를 통한 서남권 해양관광산업 발전전략 - 지삼업(부경대 해양스포츠학과 교수)우리나라는 도시화의 가속화, 개인소득의 증가, 마이카시대의 일반화, 사통팔달의 교통망에 의해 어느지역에서나 최대 2시간이면 바다로의 접근이 가능한 곳이다. 주2일 휴무제 전면실시에 따른 개인 여가시간 증대와 아열대성기후로의 심화발전에 따른 해양스포츠 활동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해양스포츠산업과 해양관광산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대불산단 전봇대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2008년 취임 초기던 이명박 대통령이 개혁대상 대표사례로 꼽은 것인데, 대불산단에 전봇대 몇 개가 이전되지 않아 공장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였다.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봇대는 금방 이전되었고, 업체들의 불편도 없어졌다. 이것이 소위 ‘대불산단 전봇대 사건’이다.요즘에 대불산단에 가면 배를 만드는 조립용 블록을 싣고 온 도로를 점유하며 움직이는 초대형 운송차량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런 운송차량이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도로를 막고 있던 전봇대를 제거해서 가능한 일이 됐다.그러나 전봇대 사건은 대불산단에 아이러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앞서 설명했듯이 대불산단은 자동차, 화학, 기
대불산단과 현대삼호중공업이 있는 삼호읍에서 영암군이 거둬들이는 지방세는 연간 500억원에 달한다. 이중에서 100억원 정도가 현대삼호중공업에서 나오는 것이고 나머니 400억원은 대불산단에서 받는 것이다. 현재의 영암군 지방세 수입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방법은 없을까. 대불산단내 업체들이 매출을 늘리게 하면 될 일이다.그러나 현재의 대불산단 입주업체들은 조선부품 조립분야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불산단이 변하고, 아울러서 영암군도 지방세 수익을 크게 높힐 방안을 5회에 걸쳐 찾아본다.지난 20일 오후 대불단지내 한 제조업체. 넓은 마당에 철판들이 널려있고, 공장안에서는 배를 만드는데 필요한 대형 블록이 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