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신씨 집성촌...신승남 검찰총장 등 인재배출

노노동 마을은 거창신씨 집성촌 마을로 70여명의 주민들이 한가족처럼 오순도순 지내는 곳이다. 사진은 마을회관에서 내려다본 마을전경의 모습.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덕진면의 산자락 곳곳에는 내린 눈이 남아 하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가운데 9일 덕진면 노송1구 노노동마을을 찾았다.

노노동 마을은 영보풍향제가 열리는 영보정에서 금정면 방면으로 약 1㎞정도를 가다보면 우측에 마을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표지석으로부터 약 500m 가량을 차량으로 더 이동하자 오래돼 보이는 마을회관과 정자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회관안에는 마을주민들이 모여 간단한 과자를 함께 나눠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갑작스런 낯선 사람의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반갑게 맞으며 마을에 대한 소개를 상세히 알려주었다.

마을주민 양삼례 씨는 "우리마을은 마을 뒤로는 천지봉과 앞쪽으로는 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어 멋진 풍경과 함께 살기 좋은 마을이다"며 "맑은 공기와 멋진 자연환경속에서 주민들 대부분이 80대이상 고령자로 장수마을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영암문화원의 '영암의 땅이름' 책자에따르면 노로동, 노노리(老老里)라고도 하며 노송리 솔밭 밖에 있다하여 노로동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장수(長壽)노인이 많다하여 노노동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고 기술돼 있다.

하지만 신안군청에서 공직생활을 하다가 퇴직후 노노동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는 신정희씨는 문화원 자료에 나온 내용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일축하면서 마을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한 지가 오래됐고 정리된 문서를 갖고 있지도 않아 대략적인 얘기밖에 할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신 씨에 따르면 마을에 대해 연구하던 10여년 전 마을에서 발견된 기와를 전문기관에서 분석한 결과 고려 중엽 12~13세기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했다.

당시에 해안선을 따라 마을 위쪽 활성산에 현재로 치면 사단 규모의 병력이 주둔한 것으로 역사서에 나와 있고 이를 근거로 추정해 보면 주둔군의 핵심 인물들이 이 마을을 이뤘고 그들이 인심을 얻어 노노동이 된 것이다.
 

마을 가운데 위치한 마을회관에 마을주민들이 과자를 함께 나눠먹으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신 씨의 말을 뒷받침하듯 마을에는 90대이상 어르신들이 2명, 80대이상 어르신들이 10여명에 이른다. 또 80이상 고령어르신들도 일상생활에 아무지장이 없을 정도로 정정한 모습이었다.

마을 중간에 있는 마을회관은 지난 1977년 새마을운동 바람이 한창일 때 세워져 이제는 낡을 대로 낡아져 있었지만 올해에는 군의 예산지원으로 610㎡(187평)규모로 신축할 예정이다.

회관 바로 옆에는 여름철 농사일에 지친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연풍정이라는 정자가 소박하게 마을회관과 이웃해 있다.

노노동 마을은 송내송외마을과 더불어 마을주민 절반정도가 거창 신(愼)씨 일정도로 거창신씨 집성촌 마을이다.

더불어 마을주민들 대부분이 벼농사에 종사하고 있으며 벼이외에 특별작물은 거의 재배하지 않는다. 마을앞쪽에 펼쳐진 논의 대부분은 친환경농업단지로 무농약 우렁이농법을 통해 친환경 쌀을 생산하고 있다.

마을회관의 주민들을 뒤로하고 나오자 뒤편에 커다란 산이 하나 보였다. 마을주민에 따르면 예전부터 마을에 가뭄이 들면 천지봉 정상에서 사람들이 모여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 주민들은 천지봉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특별한 사건?사고없는 조용한 마을이지만 마을출신 인물들은 많은 편이다. 서울대 법대출신으로 검찰총장까지 지낸 신승남씨가 이 마을출신이고 육사1기생인 신동균씨, 초대 영암문화원장을 지낸 신용석씨, 최근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신원범씨, 덕진면 부면장을 지냈던 양옥군 씨가 노노동 마을 출신이다.

양희현 이장은 "노노동 마을은 거창 신씨 집성촌으로 어느 마을보다 유대감이 좋고 단합심도 좋다"며 "예전에 비해 마을의 규모가 크게 줄었지만 큰 인물들이 많이 나왔을만큼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마을"이라고 말했다.

"인정넘치고 한가족같은 마을"  - 마을에서 만난사람> 박용상 씨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던 박용상(73)씨를 만났다. 박 씨는 지난 1950년 노노동마을에 들어와 지금까지 60여년이 넘게 마을을 지켜왔으며 마을이장까지 지냈다.

박 씨는 "노노동 마을은 예부터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보니 항상 가족같은 분위기가 자랑이었다"며 "우리마을뿐만 아니라 인근지역 10개마을이 함께모여 음력 5월 5일이면 영보정에서 영보풍향제를 지내 유대관계를 지속해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박 씨는 "다른 농촌마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산업화로 100여호에 이르던 마을규모가 어느새 40호로 줄어들어버렸다"며 "마을주민들 대부분이 70~80대 노인으로 농사를 짓는데도 어려움이 크다"고 하소연했다.

또 박 씨는 "특히 우리마을은 80대이상 어르신들이 마을주민의 20%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장수마을"이라며 "정기적으로 집에서 키우는 토끼를 잡아 마을 어르신들을 대접해오고 있다"고 밝혔다.

박 씨는 "현재 마을에 70여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70대인 자신이 결혼한 남자중 가장 젊은 나이이다"며 "40대도 있고 50대도 있긴 하지만 모두 미혼인 상태로 지내고 있어 마을총각 장가보내기 운동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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