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레저산업의 꽃은 역시 마리나다. 요트의 계류와 보관·관리는 물론 숙박시설, 식당, 컨벤션센터, 쇼핑몰 등이 망라된 마리나 건설은 신개념 리조트로서 이미 선진국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게다가 마리나 건설은 해양레저문화를 앞당기는 첩경이다. 정부는 현재 1천여척에 불과한 레저선박이 2019년에는 1만척이 넘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정부가 목포를 비롯해 전국에 43개 마리나 건설을 계획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요트산업 기반마련 선점을 위한 지방자치단체들의 경쟁도 본격화 하고 있다. 국내 해양레저산업의 선진지역인 경남 통영을 찾았다.통영 도남동에 위치하고 있는 금호 충무마리나는 민간최초의 마리나이다. 1994년 7월 개장한 금호충무마리나는 90척의 해상
영암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례2005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엮고, 한울아카데미가 발간한 에 게재된 6.25 사변 후 영암의 민간인 집단 학살 몇 사례를 전재한다. 영암 금정 덤재 보도연맹 학살1950년 7월 20일 국군과 경찰에 의하여 보도연맹원 등 200-300명이 영암군 금정면 덤재 골짜기(송장고개)에서 피살되었다.사건내용을 보면 영암 보도연맹 원들은 1950년 7월 중순 예비 금속되어 군경이 장흥 쪽으로 후퇴하던 7월 20일 경 영암과 장흥의 경계인 덤재 골짜기에서 학살되었다. 한 구덩이에 5-6명씩이 있었으며, 구덩이가 40-50개 정도 됐다고 한다. 200-300명이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의 소리재
영암 피살자 7.175명 명단 입수6.25사변이 일어 난지 62년이 되었다. 당시 어린소년들이 노년에 들어 선지 오래되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는데도 영암군단위의 6.25에 대한 진상규명도 없이 유족은 물론 군민들도 가슴에 그 아픔을 안고 살아왔다. 이제나마 당시의 왜곡된 사상과 이념, 사소한 갈등과 원한으로 촉발된 참상의 일부만이라도 규명함으로써 희생된 모든 이들의 원혼을 달래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 간에는 서로가 화해와 용서로 가슴에 매친 응어리를 풀어가자는 뜻에서 이 글을 다룬다.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남편과 아버지가 학살되고, 형제자매가 학살되었으며, 오순도순 살아가던 이웃이 학살되었다. 열 살도 못된 수많은 어린애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이웃끼리도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좌익이 우익을,
지난 영암군의회 제207회 임시회에서 삼호읍 출신 김철호 의원은 ‘장군바위’로 부르고 있는 구정봉을 ‘큰바위얼굴’로 홍보하여 영암의 지명도를 높이고, 월출산을 세계적인 명소로 가꾸어줄 것을 군에 요청했다.월출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구정봉 구역은 영암의 지명이 태어난 곳으로 영암인의 뿌리나 다름이 없다. 1897년에 만들어진 『호남읍지』에는 ‘월출산 구정봉 밑에는 동석(動石)이 있다. 이 동석은 세 바위가 특이하게 바위 위에 있어 높이가 수십 질이요, 둘레가 십 여위다. 중국 사람이 큰 인물이 나온다 하여 이 세 바위를 다 떨어뜨렸으나 바위 하나가 다시 올라가 제자리에 있으므로 신령스런 바위라 하여 군(郡)의 이름을 신령 영(靈)자와 바위 암(巖)자의 영암(靈巖)이라 하였다.’라고
낮최고기온이 30도를 훌쩍넘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들녘의 농민들의 표정엔 가뭄으로 근심이 가득해 보인다.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지난 25일 길을 나선 가운데 찾아간 곳은 금정면 용흥리 세흥마을.금정면소재지 방면에서 아크로C.C. 골프장 방면으로 3㎞가량 달리다보면 우측에 돌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표지석에 세흥이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보인다.표지석에서부터 500m가량을 차량으로 이동하자 커다란 느티나무 한그루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정자와 오래돼 보이는 정자 2개가 나타났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느티나무는 200여년정도 된 느티나무로 군에서 관리하는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고 한다. 세흥마을이
구제역 파동, 한미FTA 통과 등 많은 악재속에서도 군과 축협이 하나로 뭉쳐 집중투자를 통해 축산업을 살려낸 곳이 있다. 바로 그곳은 함평천지한우로 유명한 함평이다. 함평천지한우는 한 조사기관의 조사에서 축산브랜드중 소비자인지도 부문에서 전국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있는 축산브랜드 중 하나이다. 함평천지라는 브랜드명은 판소리중 하나인 호남가의 가사에서 유래가 됐다. 판소리 호남가는 ‘함평천지 늙은 몸이~’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함평은 위 노랫말처럼 농경지가 많아 평온하고 풍요로운 전형적인 농업군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부터 젊은이들이 도시로 도시로 떠나게 되었고 농촌은
고려 國姓 중의 하나인 명문가해주최씨(海州崔氏) 시조 최온(崔溫)은 해동공자 충(沖)의 아버지로, 해주 대령군 수양산 근처에 살았는데, 그곳의 별칭이 고죽군이어서 고죽최씨라고도 한다. 시조 온은 해주 목민관으로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떨쳤으며 문장으로도 명성이 높았고, 뒤에 판사부사를 지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해주에서 이루어졌고 또 여러 대에 걸쳐 해주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해주를 본관으로 하여 대를 계승하고 있다. 해주최씨는 특히 고려시대에 명성이 높아 한국족보문화연구원 선정 고려시대 갑족 2위(승상9, 문묘배향4)에 오르기도 하였다.해주최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해동공자 동방 유학의 비조(鼻祖) 충(沖)이다. 해주최씨가 고려 국성(國姓) 중의 하나라 할만큼 튼튼한 기틀을 마련한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140여명 달해문(文)씨는 '조선씨족통보'와 '증보문헌비고' 등의 문헌에 156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는 45개 본관이 현존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정선문씨(본래 全씨)와 감천문씨 중 일부(본래 金씨)를 제외한 본관들은 모두 남평문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보아 문(文)씨는 남평문씨 단일본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남평문씨 시조는 신라 때 인물 무성공 문다성(多省)으로, 여러 고위 벼슬을 거쳐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의 아들 문탁(倬) 이후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하여 고려중기에 우산기상시, 좌복야 등을 지낸 경절공 문익(翼)을 중시조(1세)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남평문씨는 고려 때 많
최씨(崔氏)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씨 중의 하나로, 많은 최씨 본관들이 경주최씨에 그 연원을 두고 동조동근(同祖同根)을 주장하기도 하는데,(낭주최씨는 연원을 달리한다) 오늘날 최씨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경주최씨상계세보'와 1968년 발행된 '아동최씨고'(我東崔氏考)의 주장도 상이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모든 최씨가 신라초기 소벌도리(紀元前 1세기)와 최치원(857년생)을 잇는 신라인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대체적으로 이론이 없는 것 같다.최씨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명망을 높이고 권세를 누렸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약간 쇠침하여 상신 7명, 대제학 4명, 문과급제자 437명을 배출하였다. 최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153개
한우산업이 벼랑 끝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해 최악의 구제역 파동으로 소 값이 폭락하고 사료비마저 크게 올라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한우 농가들은 이제 한미FTA 통과라는 거센 파고를 맞이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이에 한우농가들은 보다 질좋은 고급한우브랜드를 육성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가고 있다.관내에는 영암의 자체브랜드인 매력한우와 전남도 광역브랜드인 녹색한우가 서로 경쟁관계를 형성하면서 고급육 생산으로 지역주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축산환경 속에 통합을 통해 보다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전국적인 브랜드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역 내에서도 커지면서 두차례 통합을 위한
낮최고기온이 30도 가까이 오르는 무더위를 식혀주는 봄비가 내리면서 지쳐있던 만물이 생기를 머금어가고 있고 들녘의 농민들의 표정엔 함박 웃음이 가득해 보인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14일 길을 나선 가운데 찾아간 곳은 영암읍 송평리 송계마을.영암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도포면 방면으로 달리다보면 송평교라는 작은 다리가 있고 다리 바로 옆에 송계마을 표지판이 보인다.영암문화원에서 발행한 영암의 땅이름 책자에 따르면 송계마을이란 지명은 월출산에서부터 영암천변을 따라 소나무가 마을 앞까지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들 끝에 있는 동내를 솔 송(松)자와 시내 계(溪)자를 합하여 송계라고 하였다. 하지만 현재 마을 주변에는 소나무를 대부분 베어버려서 몇그루 보이지 않았다.마을안내 표지판을 따라 500
전국 회원 1,800만명. 가맹단체 66개. 올해로 창립21주년을 맞이하는 국민생활체육회의 규모이다. 흔히들 시군구에서 ‘생체’로 불리우는 생활체육회의 중앙조직이다.이 국민생활체육회 8대 회장으로 지방자치단체장 출신의 유정복 국회의원(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최근 취임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에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여권에서도 ‘힘 있는 실세’로 통하는 유정복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공공스포츠클럽 활성화와 학교체육 진흥”을 천명했다.전국 200개 시군구 지역신문 연합체인 한국지역신문협회에서는 오는 5월 11일부터 3일간 대전광역시에서 열리는 생활체육인의 큰 잔치 ‘제12회 전국생활체육대축전’준비에 여념이 없는 유정복 국민생활체육회 회장을 4월 말 만나 인
남해안고속도로 영암~순천간 구간이 지난달 26일 개통했다. 2002년 12월 첫 삽을 뜬 지 10년 만이다. 당초 올해 말 개통 예정이었으나 다음달 12일 개막하는 여수 엑스포를 고려해 개통을 앞당겼다.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대불테크노폴리스(구 대불산단)는 순천, 광양까지 약 1시간 정도면 이동이 가능해 연간 약 100억 원 이상의 물류수송비용 절감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영암의 경우 남해선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서영암IC 또는 강진 IC를 이용해야 한다. 영암군민들에는 다소 불편한 점이 있지만 전체구간(106.8㎞)에 IC는 서 영암을 포함 8개소나 건설돼 도로진입이 용이하다는 것이 도로건설 관계자의 전언이다.지난달 29일 찾은 고속도로 곳곳에는
한차례 비가 내린 후 낮 최고기온이 20도를 넘는 따뜻한 봄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덕진면의 거리 곳곳에는 유채꽃, 개나리꽃 등 다양한 이름모를 꽃들이 만개하고 있었다. 구름 한점이 없는 맑은 날씨가 이어지는 가운데 23일 덕진면 노송3구 부항마을을 찾았다.부항마을은 영암읍에서 영보정으로 길을 따라가다보면 우측에 돌로 된 작은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에는 홍암, 부항이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또 작은 농로길을 따라 2~3㎞가량 이동하다보면 금정면과 덕진면의 경계가 되는 산을 배경으로 10여가구의 작은 마을이 하나 보인다. 바로 이곳이 부항마을이다.영암문화원의 영암의 땅이름 책자에따르면 ‘조선 정조때 기록인 호구총수에 의하면 부자 부(富)와 목 항(項)을 따서 부자될 마을이라는 뜻의 부항(富項)이라
전몽성, 몽진 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과 함께 큰 공 세워도시조는 전섭, 천안全씨 시조는 전낙全(전)씨 도시조(都始祖)는 전섭(全聶)인데, 그는 온조가 백제를 건국할 때 10공신(十濟功臣) 중의 한 사람으로 환성군(歡城은 천안)에 봉해졌다. 그 후 全씨는 한국인 문헌에 17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감천 경주 기장 나주 성산 성주 옥산 옥천 완산 용궁 정선 천안 죽산 팔궁 평강 함창 황간 전씨 17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고이다. 모든 전씨는 백제 개국공신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있다. 전씨시조 단소는 충남 천원군 풍세면 삼태리 태학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양력 10월3일 시향을 모시며 단소 및 제설은 충남지방문화재 제297호로 지정(1987. 12. 30)관리해 오고 있다.全씨의 연원에 대하
■ 송나라에서 귀화한 신수가 시조거창신(愼)씨의 시조는 고려 문종 때 송나라에서 귀화한 신수(愼脩)로서 거창신씨는 중국에 연원을 두고 있는 성씨들 가운데 하나이다. 시조 脩(수)는 학식이 풍부하고 의술에 능했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수사공,우복야,참지정사 등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안지(安之)가 지수주사(知水州事. 경기도 수원의 관리)가 되었기에 수원신씨라고 한 적도 있었으나, 후손 군기감사 성(成)이 아버지를 여읜 후 경남 거창에 내려가 살면서 거창신씨의 시원이 되었다. 인구조사에서 愼씨는 인구 수백 명의 본관들도 나타나나 '거창' 단일 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거창신씨는 인구수에 비해 인물이 많다. 안지는 병부상서,삼사사,판합문사 등을 지냈는데, 한어에도 능통하여 송나라와 요나라에 보내는 공문
■ 신라 진평왕의 사위 조계룡이 시조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사위로 전해 오는데,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며, 그의 출생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 태생으로 그녀가 우연히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卿相))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가 번영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아들을 낳으니 겨드랑이 밑에 曺(조)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학사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신기하게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인 지난 5일 하늘은 봄을 재촉하는 봄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촉촉하게 내리는 비가 온 세상을 적셔주며 추위와 싸우며 견디어낸 초목들이 새싹을 틔우도록 돕고 있다.군서면 동호마을을 지나 마을외각도로를 타고 2㎞가량을 차량으로 이동하다보면 좌측에 모정마을 표지석이 나타난다. 모정마을 표지석을 뒤로하고 좁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마을 입구의 넓은 주차장과 오래된 고목이 반기고 있다.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벽화다. 마을의 모든 집 담벼락에 우리의 전통풍습과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는 전남도에서 지원하는 행복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으로 지난해 그려진 것이다. 벽화를 따라 마을을 가로질러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모정저수지
남도의 도자기는 영암구림도기를 먼저 이야기한다. 구림도기에 앞서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기에 도기의 발생이 가능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생산된 것이 옹관이다. 입이 넓은 큰 항아리에 시신을 넣어 매장하는 옹관묘 장례풍습은 신석기 시대부터 서해안 일대에서 상당히 많은 양이 분포했다. 이런 옹관은 3세기~5세기 중반까지는 영산강 유역에서 크게 성행했다. 옹관문화가 알려진 것은 지난 1960년 시종면 내동리 고분에서 대형 옹관이 발굴되면서 나타났다. 삼호읍 용암리에서 출토된 U자형 옹관은 2개가 1조를 이루는 함구식 옹관으로 마한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런 옹관을 통해 도기의 기술이 발달했고 영암 구림도기에서 꽃을 피우게 됐다. 구림도기가마터는 8~9세기 대규모 도기 제작
절기상 입춘이 지났지만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대지를 감싸고 있다. 찬바람과 간간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찾아간 곳은 군서면 동호마을. 군서면사무소에서 군서면소재지 방면으로 500여m를 달리다보면 우측에 월출전통된장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3㎞가량을 더 들어가다보면 커다란 화강암에 제비그림과 함께 동호마을이란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마을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뒤에는 월출산이 한눈에 보이는 곳으로 넓은 들판의 영향으로 예전부터 농토가 많아 쌀이 남아돌만큼 풍부했던 지역이다.동호마을은 예전에 지남저수지 동쪽 변두리에 있다하여 동변(東邊)이라 하였으며 1600년대에 최대천이 계부인 최원립이 순절한 후 월출산의 웅장한 모습과 넓은 농지를 찾아 정착하여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