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 걸어 독천장 다니던 사람들 이제는 버스가 이동수단보리쌀 한말 이고 30리 독천장에 가면 머리가 흔들흔들 했제학산면 독천에서 석포를 지나 영산강을 타고 북상하는 길은 갈수록 영산강으로 깊숙이 빠져드는 방향이다. 영산강이 거대한 몸채를 드러내며 바다같은 풍광이 펼쳐진다. 그러나 예전 이 길은 한번 들어가면 반드시 되돌아 나와야 하는 구절양장의 길이었다. 태평정이란 마을을 지나 작은 고개로 올라가 보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덕진면과 서호면쪽에서 내려온 강줄기가 영산포 쪽에서 내려오는 본줄기와 만나면서 광할한 삼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영산강 하구언이 막아지고 간척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에서 앞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오던길로 다시 나가거나 서호면 소산리나 쌍
지금은 사라졌지만 영암은 한때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다. 60년대에 삼호읍 삼포리에 대규모 염전 집산지가 있어서영암의 소금이 이곳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됐다. 1966년 7월 13일자 경향신문에는 영암의 소금업자들이 가격 하락 때문에 심각한 난관을 겪고 있어 소금비축제 실시를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삼호읍 삼포집산지에 소금을 납품하는 염전업자는 20여명이었다. 이들이 운영하는 염전이 260정보, 그러니까 1정보는 3천평에 해당되기 때문에 총 78만평에 달했다. 생산업자들은 64년도부터 소금값이 폭락해 66년에는 가마당 60원선까지 내려가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염전업자들은 1정보당 약 1천300가마~1천400가마를 생산했다. 가마당 60원선이였기 때문에 1정보당 수익이 8만4
영산강 하류는 바닷물이 들락날락 했던 곳이기 때문에 어업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학산면 석포(石浦)마을 이길남(71)씨도 전문 어부였다. 작은 통통배를 가지고 멀리 영광 칠산앞바다까지 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10여일동안 바다에서 생활을 하며 고기를 잡아 목포에서 팔았다. 석로 돌아온 배는 빈배였지만 호주머니에는 돈이 두툼이 들어있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가족들 생계를 꾸리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지금 같으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을 하고 다녔지요. 그 작은배에 4~5명이 타고 칠산앞바다까지 고기를 잡으로 다녔능께하구언이 들어서면서 이씨의 생활도 완전히 바뀌었다. 배가 멀리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석포앞바다에 장어도 올라오지 않았고, 숭어도 나타나지 않았다.이씨에 따르면 영산호가 완
하구언이 막아지고 갯벌이 사라졌지만 낙지는 영암의 영원한 마스코트나 마찬가지다. 독천의 낙지 요리는 지금도맥이 이어지고 있다. 대도시 사람들도 낙지를 즐겨먹는 것은 마찬가지다. 동아일보 1976년 1월 21일 자에는 영암낙지를 소개하면서 낙지가 서울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음식이 된 이유가 적혀 있어 관심을 끈다. 신문에 따르면 도시민들이 실낙지 수요가 폭증해 영암일대의 낙지잡이 어민들이 큰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72년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나서부터 일어난 현상이라고 했다.호남고속도로를 통해 싱싱한 실낙지가 산채로 서울에 상륙하면서 서울의 낙지 수요가 폭증했다는 것이다. 서울 무교동의 유명한 낙지골목도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된 얼마후 생겨났다고 한다. 신문은 낙지잡이로 큰 재미를 보고
나불도에서 강변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고속도로 공사현장을 만난다. 목포~광양 고속도로다. 우람하게 서 있는 교각 주변에 집이 몇채 보인다.마을이라고 할 것도 없이 집들이 뛰엄뛰엄 서 있다.이곳이 바로 삼호읍 동호리감치란 곳이다. 한때 영산강 하류에서 가장 큰 선창이었던 곳이자 이웃한 독천시장의 물량이대부분 거쳐가던 곳이다. 영산강 하구언 완공 후 가장 큰 변화를겪은 곳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 감치마을을 꼽지 않을 수 없다.담양 추월산을 출발한 영산강은 하류로 내려오면서 수 많은 지류와 만난다. 각 지류에서 유입되는 수량은 영산강을 풍성하게 하며 바다를 향해 흐른다. 영산강물이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는 지류중의 하나가 바로 학산면 독천에서 내려온 망월천이란 하천이다. 영산강과
1981년 2월 28일 오후 영산강하구언 공사현장. 초속 4m의 세찬 물살이 쉬~익 용트림을 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둬들였다. 영암군 삼호면 삼호리와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를 잇는 4.35㎞ 하구언 제방이 막 이어진 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의 일이다.수천년 동안 쉬지 않고 영산강으로 들락날락하던 바닷물이 막아졌다. 삼호면 주민들과 삼향면 주민들은 최종 물막이 공사가 성공하는 현장에서 서로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당시 언론들은 천형(天刑)의 땅이 낙토(樂土)현장이 됐다 고 표현했다.그럴만도 했다. 영산강 하구언 공사는 영암과 목포, 무안, 나주, 함평 등 영산강 유역지역의 역사(歷史)를 바꾼대 역사(役事)였다. 당시 영산강 유역은 상습적인 한해와 홍수를 겪고 있었다. 이일대의 연강 강수량은
1978년 우리 영암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재수좋은 사람이 탄생했다. MBC라디오가 수출100억달러 달성을 기념해 마련한 특집방송에서 퀴즈를 내고 특등상품으로 포니 승용차를 내걸었는데 영암 덕진면 장선리 3구에 사는 한상열씨가 대상의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당시만 해도 포니승용차 한 대는 꿈의 상품이여서 전국에서 51만1천562통이 옆서로 응모해서 우리나라 방송 사상 최대 경쟁률을 보였다추첨은 78년 1월 10일 '이밤을 즐겁게' 란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됐는데 전라도 끝 영암땅에서 주인공이 나온게 단연 화제였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행운이 많은 사람이 된 한상열 특등 당첨자는 당시 18세로 영암 종합고에 재학중인 학생이어서 더 큰 관심을 받았다. 경향신문 1월 11일자에는 이 일을 상세하게 다루고
1010년 어느날 밤 고려 현종 임금은 꿈을 꾸었다.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지금 빨리 바다를 건너 피신하라고 했다. 현종은 밤중에 바다를 건너 목숨을 구했다. 현종이 잠을 자며 꿈을 꾸었던 곳이 영암 시종면 옥야리 남해포였고, 밤중에 바다를 건너 닿은 곳이 무안군 몽탄이었다. 현종은 거란족이 쳐들어와 남쪽으로 피신중이었다.훗날 현종은 남해포에 남해신당을 짓게하고 자신을 구해준 남해신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제사는 영암과 강진, 나주, 영광, 함평의 수령들이 돌아가면서 지내게 했다. 남해포에 지금도 남해신사가 있다.남해포에서 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옥야리 야산. 10여개의 커다란 무덤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옥야리 고분군이다. 옥야리 주민들은 어릴적에 눈이오
지난달 29일 오후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 구 선창마을 입구. 승용차를 타고 직선도로로 들어가자 군인들 길을 막았다.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민간인들은 더 이상 들어 갈 수 없었다. 이곳이 바로 영암과 강진, 장흥, 해남, 완도등 5개 지역 사람들이 목포로, 또는 서울로 가던 관문이었던 선창마을이다. 1978년 영산강 하구둑이 설치된 후 수백년 동안 이어오던 선창의 기능은 멈춰섰다. 사람들은 차량을 이용해 하구둑을 건너 목포를 오갔다. 2007년에는 해군시설이 들어오면서 이곳을 지키며 살던 주민들도 뿔뿔히 흩어졌다. 5대 관문(5개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던 통로)으로 통하던 선창마을은 영영 역사속으로 사라졌다.영암과 강진, 장흥, 완도등의 나이 지긋한 주민들은 용당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용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