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독천장에 상품 공급하던 물류센터 사람들 북적이던 포구 이제는 쓸쓸한 농촌마을로

한때 어부였으나 지금은 농민이 된 이승길, 이포님 부부.
감치마을 입구에 서 있는 서진 창고의 모습이 쓸쓸하게 보인다.
감치마을은 하구언이 막아지기전 매일같이 북적거리던 선창이었으나 지금은 쓸쓸한 마을이 됐다.


나불도에서 강변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고속도로 공사현장을 만난다. 목포~광양 고속도로다. 우람하게 서 있는 교각 주변에 집이 몇채 보인다.마을이라고 할 것도 없이 집들이 뛰엄뛰엄 서 있다.

이곳이 바로 삼호읍 동호리감치란 곳이다. 한때 영산강 하류에서 가장 큰 선창이었던 곳이자 이웃한 독천시장의 물량이대부분 거쳐가던 곳이다. 영산강 하구언 완공 후 가장 큰 변화를겪은 곳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 감치마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담양 추월산을 출발한 영산강은 하류로 내려오면서 수 많은 지류와 만난다. 각 지류에서 유입되는 수량은 영산강을 풍성하게 하며 바다를 향해 흐른다.

영산강물이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는 지류중의 하나가 바로 학산면 독천에서 내려온 망월천이란 하천이다.

영산강과 독천의 하천에서 내려온 물이 만나는 곳이 바로 감치였다. 감치는 바다와 영암서북지 지역 육지를 연결하는 거점같은곳이었다.

하구언이 막아지기 전 영암과 목포를 잇는 거점은용당이었으나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철선을 타는 기능을했다.

감치는 영암 서북부 지역 주민들이 이곳에서 배를 타면가장 빨리 목포로 들어 갈 수 있었다. 또 좋은 갯벌이 있었고,독천에서 흘러드는 망월천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모여들었고 포구가 형성됐다. 가을철이 되면 추곡수매가 이곳에서 이뤄졌다. 지금도 일제시대 지은 것으로 보이는 창고건물이 남아 있다.

화물선이 수시로 드나들며 물품을 실어 날랐고, 이것들을 각 지역으로 나눠주는 유통망이 형성됐다. 유통망의 큰 거점이 바로 인근의 독천장이었다.

독천장이 되면 각 지역에서 물산이 몰려 들었고, 여기서 내린 물건을 실은 구르마가 줄을 이어 마을앞을 지나갔다.

사람들이 쉴새없이 오가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지 않을리없었다. 70년대 마을이 클 때는 40여호가 넘었다고 한다. 주민은 포구에서 화물을 싣고 내리며 생계를 이어갔다. 감치 사람들은 영산강에서 돈도 벌었다. 감치앞 바다는 사시사철 좋은어장이 섰다.

바닷물이 썰물때가 되면 강폭이 좁아지면서 윤기있는 갯벌이 길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이 일대의 갯벌을 참벌이라고 불렀다. 갯벌이 진하고 찰졌다.

이곳에서 잡은 장뚱어와 장어 등은 최고의 맛을 자랑했다. 이 일대는 속칭 뒷께라는 곳으로 불리었는데, 뒷께 장어, 뒷께 장뚱어라고 하면 독천장에서 최고로 비싼 가격에 팔려나갔다.

감치마을 입구에 서 있는 서진 창고의 모습이 쓸쓸하게 보인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바닷고기도 같이 들어왔다.
 
숭어, 농어,황복, 새우, 가오리가 떼를 지어 올라왔다.

사람들은 바다고기를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물을 들어올리면 그만이었다.

어른 혼자서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들이 잡혔다.

이 고기들은 목포나 독천, 영암장등으로 가지고가 팔았다. 화물을 싣고 내리는 사람들과 고기를 잡으로 가고는 사람들로감치는 쉴새없이 흥청거렸다.


2011년 4월 29일. 감치가 유명한 포구였다는 흔적은 거의찾을 수 없었다. 이리저리를 둘러봐도 간척지뿐이었다. 82년하구언이 막아지기 전에는 모두 바닷물이 들락날락 했던 곳이다.

야산밑에 유난히 낮아 보이는 토담짐 두어 채가 이곳이 예전에 바닷가였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다. 토담은 어른 키보다 적었다. 초가를 걷어내고 그 위에 스레이트를 씌운 집들이었다.

작은 집에 문이 유난히 많았다. 아마도 예전에는 손님을 받은방이었을 것이다. 주인은 누구인지알 수 없었다. 문이 닫혀 있고 모두열쇠가 채워져 있어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감치에서 최고령인 임귀내 할머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임귀내 할머니를 만났다. 임 할머니의 연세는90세였다. 이 마을에서 나이가 가장많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20여년전에 돌아가셨다. 비슷한 또래의 할머니 두 분이 더 있었는데 한분은 지난해 겨울눈이 많이 왔을 때 낙상해서돌아가셨고, 또 한분은 몸이 많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들어가있다고 했다.

조금전에 보았던 빈집은 요양원에 들어간 할머니의 집이었다. 혼자살던 주인이 요양원에 갔으니 집이 텅 비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임할머니 부부는 60년대 초반에 감치에 가면 먹고 살수 있는게 많다는 말을 듣고 무안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할아버지는 금방 부두 노무자로 취직을 했다. 주로 광석(鑛石)을실어나르는 배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월급을 집에 가져다 준적이 없었다. 밤이면 밤바다 포구에 있는 술집을 파고 살았다.

노름으로 하룻밤에 월급을 날린 적도 많았다.그나마 살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가 바다에 나가 갯것 을 잡아다 팔았기 때문이었다. 바다에만 나가면 돈이 됐능께. 사철 바닷것이 나왔는디 맛이 참 좋았제

임할머니는 독천장과 영암장으로 갯것을 팔러 다녔다. 한번 장에 가면 그때 돈으로 만원정도를 벌 수 있었다. 참고적으로, 70년대 초반 학교교사의 월급이 3만원 정도였다는 것을감안하면 당시 감치 사람들의 수입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한때 어부였으나 지금은 농민이 된 이승길, 이포님 부부.
임할머니 집과 가까운 곳에서 이승길(70), 김포님(63)씨부부를 만났다.

이승길씨는 마당이 넓고 벼 건조기까지 갖추고 있는 농부였다.

요즘에 30마지기의 논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하구언이 막아지기 전 이씨 부부는 전형적인 어부였다.

부부가 뒷께 에 나가 고기를 잡았고, 함께 장에 내다 팔았다.
하구언이 막아진 이후 간척지를 불하 받았고 팔자에 없던 농부가 됐다.

이씨에게 어부와 농부가 어떻게 다르더냐고 물었다. 대답이 돌아왔다.
바다에서는 그냥 돈을 건져올렸지만 땅은 이것저것 생산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남는게 없어요.

이씨의 손익계산서를 따져봤다. 지난해 기준으로 논 30마지기에서는 벼 370포대(40㎏)가 생산됐다. 이를 모두 팔면 한포대에 4만3천원씩 1천600만원 정도가 나온다.

이중에서 순수익으로 구분되는게 전체 수익의 59%에 해당되는 940만원정도가 이씨의 수입된다. 이같은 계산법은 자치단체가 하는것인데, 이씨는 실제 수확을 해놓고 보면 남는게 없다고 하소연 했다.

이씨는 그러나 간척지가 막아지기 직전 70년대 말을기준으로, 부부가 바닷것을 잡아 독천장에서 팔면 평균 5만원은 벌었다. 부부는 독천장과 영암장 두 곳을 봤다.

한 곳의 오일장이 한달에 네 번 서기 때문에 한달 수입이 20만원, 두 곳의 장을 봤기 때문에 40만원 정도 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참고적으로, 80년대 초반 사립대 등록금이 40만~50만원이었다. 요즘사립대 등록금이 400만원 이상이다.

기본적으로 이씨 부부는 70년대 말 요즘돈으로 월 40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으나, 벼농사만 기준으로 볼 때 하구언이 들어선 후에 월 90만원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보리농사의 경우 지난해대부분의 농민들이 이상한파 때문에 손해를 봤다.

이씨는 농사질적에 처음에는 그나마 수입이 괜찮았는데갈수록 생산비가 많이 들어가면서 논농사의 가치가 갈수록떨어지고 있다 며 아무리 생각해도 바다가 좋았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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