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떠내려오는 생활폐기물들이 오염 주범"
영암에서 목포로 가는 교통수단 획기적 큰 수확

▲ 삼호읍 산호리 부근에 있는 영산강 습지다. 하구언이 막아진 이후 영산강 곳곳에는 습지가 들어섰다.
1981년 2월 28일 오후 영산강하구언 공사현장. 초속 4m의 세찬 물살이 쉬~익 용트림을 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둬들였다. 영암군 삼호면 삼호리와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를 잇는 4.35㎞ 하구언 제방이 막 이어진 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의 일이다.

수천년 동안 쉬지 않고 영산강으로 들락날락하던 바닷물이 막아졌다. 삼호면 주민들과 삼향면 주민들은 최종 물막이 공사가 성공하는 현장에서 서로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당시 언론들은 천형(天刑)의 땅이 낙토(樂土)현장이 됐다 고 표현했다.그럴만도 했다. 영산강 하구언 공사는 영암과 목포, 무안, 나주, 함평 등 영산강 유역지역의 역사(歷史)를 바꾼대 역사(役事)였다.

당시 영산강 유역은 상습적인 한해와 홍수를 겪고 있었다. 이일대의 연강 강수량은 35억t이나 됐으나 반 이상이 홍수로 쓸려나갔다. 비가 멈추면 강바닥이 드러나 다시 가뭄을 걱정했다. 매년 천형(天刑) 같은 한수해가 반복됐다. 영산강하구언 4.35㎞는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는 공사였다. 하구언은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상류에서 흘러든 민물은 안쪽에 저장했다.

▲ 1981년 2월 영산강 하구언 모습지난 1981년 2월 28일 물막이 공사가 막 끝난 영산강하구언 공사현장 모습이다.<경향신문 1981년 3월 4일자 사진
▲ 2011년 4월 23일 모습지난 23일 한국농어촌공사 영산강하구언관리사무소 옥상에서 찍은 하구언의 모습이다. 우측 도로로 하루 20만대가 넘는 자동차가 통행하고 있다.
바닷물이 역류해서 농경지에 염해를 입히는 일이 자취를 감추었고 우기에 강이 범람하는 홍수피해 등이 쉽게 조절됐다. 2억5천만t의 물을 담는 담수면적 3천460ha의 영산호라는 거대한 담수호도 들어섰다. 이 담수호에서 영암과 목포, 무안,함평 등의 농경지 2만7천ha의 논에 물을 대주었다.

목포로 연결하는 교통망도 혁명적인 변화가 뒤따랐다. 하구언이 막아지기 전 목포로 가는 사람들은 삼호면 용당에서 철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다. 하구언은 국도2호선을 목포로 바로 연결시켰다. 요즘에 하구언을 오가는 차량은 하루 20만대 이상에 달하고 있다.

하구언 공사가 그해 12월 8일 완공된 후 강 상류의 간척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간척사업으로 새로 얻게 된 농경지가 5천500㏊나 됐다. 1만5천300㏊의 논경지는 상습 한수해 피해지역에서 벗어났다. 이곳에서 쌀 5만6천t이 생산됐고 기타작물 3만9천t 등 총 9만5천t의 식량증산 효과를 가져왔다고 각종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로부터 30년 후 영산강 유역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최근까지 거론된 변화를 살펴보면 영산강 오염을 들 수 있다. 영산호의 수질이 아주 심각하게 악화됐으며 상류에서 토사가 밀려들면서 영산호의 수위는 점점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퇴적물이 쌓여가면서 강의 폭이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도있다.

그럼 영산강 주변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영산강주변에서 강에 의지해 살아오던 사람들의 삶도 참 많이 변했을 것이다. 영산강하구언은 수백~수천년 동안 이어져 오던 주민들의 삶을 바꾸어 버렸다. 지난 23일 영산강하굿둑으로 갔다.

행정구역으로 삼호읍삼호리다. 벚꽃이 많이 시들었다. 하얀 벚꽃이 지면 활엽수가 푸른 잎을 토하기 시작한다. 전남농업박물관 주변 숲이 마치연녹색 물감을 뿌려놓은듯 생명력이 분출하고 있었다. 도로에는 목포로 들어가는 차량과 목포쪽에서 나오는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영산강하굿둑은 쉬지않고 피가 흐르는 동맥같은 곳이었다.

농업박물관쪽으로 들어가 길을 따라 올라갔다. 얼마되지 않아 광활한 영산호가 눈에 들어왔다. 옛 나불도란 섬이 있었던 곳이자 영산호관광지가 있는 곳이다. 건너편에 도청건물이 보이고, 영산호 중간으로 철도가 지나고 있었다. 나불도는 이제 육지가 됐다. 지도에 보면 마치 혹처럼 툭 튀어나온 외도란 곳이 나불도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나불도 한 켠에서는 전남 개발공사가 짓고 있는 21개 객실규모의 한옥호텔 공사가 한창이었다.

나불도에 대한 일화가 있다. 76년 10월쯤 고 박정희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하구둑 사업이 펼쳐질 현장을 둘러보던 중 바다에 떠있는 나불도를 발견하고는 동행한 공무원에게 사들여서 관광지로 만들라 는 지시를 내렸다. 이 정보를 알게 된 한 공무원이 현찰 2억원을 트럭에 싣고 섬으로 들이닥쳐 하루 만에 땅을 몽땅 사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하구둑이 완성되고 수면이 낮아지면서 나불도는 육지와 이어지고 박대통령이 지시한 관광지개발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외도의 끝자락에 유람선 탑승장소가 있었다. 영산호를 구경할 수 있는 유람선이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였는데도 사람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영산강하구둑이 완공될 때 또 하나의 희망은 이곳이 동양최대의 담수호로서 새로운 관광지가될 것이라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나불도의 역사가 그러하듯 영산호는 대도시 주변에 있는 작은 관광지 정도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둑을 타고 영산강 상류를 향해 올라갔다. 담양군 용면 해발560m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장장 137km를 내려온 영산강이이곳 영산호에서 큰 호수를 이루었다. 북쪽에서 강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넓은 호수를 감싸고 끝도 없는 강둑이 이어졌다. 왼쪽은 영산강이고, 오른쪽은 논경지다.

하굿둑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모두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이다. 튼튼한 둑이 들어서면서 이제 수리 안전답이 됐다. 둑 곳곳에는 자연습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장승과 함께 습지 안내판이 있었는데 모양이 이뻤다. 둑과 강물사이에 웅덩이가 생기면서 갈대가 자라고 습지가 생겨났다.

한참을 올라갔을 때 산호양수장이 나왔다. 산호양수장은영산호에서 각 농경지로 물을 퍼 올리는 64개 양수장 중의 하나이다. 첫 민가도 그곳에 있었다. 삼호면 산호리 중촌마을이다. 영산호둑을 타고 올라가며 그곳에서 첫 주민을 만났다. 영암무화과 클러스터사업단의 단장을 맡고 있으면서 이곳에서 직접 무화과농사를 짓는 김종팔(61) 단장이었다.

▲ 김종팔 단장
그는 영산강하구언이 막아지고 나서 영산강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 김단장은 영산강하구언이 막아진 후 가장 큰 변화는 농토가 넓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풍부한 해산물이 사라진 것과 영산호의 수질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것을 큰문제점으로 꼽았다.

김 단장은 하구둑이 막아진 후 채 10년이 되지 않아서 기형어종이 발견되기 시작했다며 하구언을 막으면서 수질악화를 비롯한 환경적인 검토가 부족했고, 공사 후 예방조치도 거의 없었다 고 지적했다. 김단장은 하구언 완공 후 삼호읍 일대의 땅값이 일정부분 상승했지만 개발이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지 주민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초창기에 투기꾼들이 땅을 많이 올려 놓았지만 실제 주민들에게 돌아간 혜택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김 단장은 영산강 주변 농경지에 대한 현지 농민들의 권리가 합리적인 방법으로 인정되길 바란다 고 말했다.

지금부터 북동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감치란 옛 포구가 나오고 그 위쪽으로 석포란 마을이 있다.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방향을 잡아 상류쪽으로 올라갔다.<계속> 글 사진= 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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