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산면 매월리 ~ 서호면 태평정마을

태평정마을주민들이 그늘에 모여 앉아 옛날을 회고하고 있다.
미교리 서재국 씨
미교마을에서 태평정마을로 가는 영산강 도로변에 오래된 집이 아련한 옛 추억을 전해주고 있다. 영산강에서 어업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의 집은 대부분 이렇게 폐허가 되다시피했다.

산길 걸어 독천장 다니던 사람들 이제는 버스가 이동수단
보리쌀 한말 이고 30리 독천장에 가면 머리가 흔들흔들 했제

학산면 독천에서 석포를 지나 영산강을 타고 북상하는 길은 갈수록 영산강으로 깊숙이 빠져드는 방향이다. 영산강이 거대한 몸채를 드러내며 바다같은 풍광이 펼쳐진다.

그러나 예전 이 길은 한번 들어가면 반드시 되돌아 나와야 하는 구절양장의 길이었다. 태평정이란 마을을 지나 작은 고개로 올라가 보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덕진면과 서호면쪽에서 내려온 강줄기가 영산포 쪽에서 내려오는 본줄기와 만나면서 광할한 삼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영산강 하구언이 막아지고 간척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에서 앞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오던길로 다시 나가거나 서호면 소산리나 쌍풍리쪽을 돌아야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걷다보면 그 길은 다시 남하하는 길이고, 그렇게 나오다 보면 다시 독천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강과 바다가 마치 치맛자락 찢어지듯 형성돼 있었고 찌저진 치맛자락으로 옮겨 갈 수 있는 다리는 없었다. 그러니 걸어 들어갔던 곳을 다시 되돌아 나올 수밖에.
 
그런곳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서호면 태평정마을은 서호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마을중의 하나다.

이 일대는 1978년까지 외지로 나가는 길다운 길이 없었다. 목포에 가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2㎞ 떨어진 지금의 서호양수장 있는 곳에서 통통배를 타고 다녔다.

미교마을에서 조금 올라가면 가래섬이라는 조그만 섬이 있다.
장은 독천장을 보러다녔는데 그 길이 보통 고생길이 아니였다.

장을 보기 위해서는 가는데 한나절, 오는데 한나절 해서 꼬박 하루를 잡아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독천장까지 거리는 30리에 달했다. 장에 가기 위해서는 건너편 백운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큰 재를 서너개를 넘어야 했고, 오는 길도 그렇게 와야 했다.
 
태평정마을 이갑순(76) 할머니는 "보리쌀 한말 머리에 이고 독천장에 도착하면 머리가 흔들흔들 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며 "그때 골병이 들었는지 지금 온몸이 아프지 않은데가 없다"고 했다.
 
정연심 할머니는 "장을 보고서 오는 길에 집에서 젖먹이가 기다리는 것을 생각하면 잠시도 쉴새가 없었다. 항아리를 이고 30리 길을 걸어오면서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려올 때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정할머니는 "고생이 말도 못했다. 지금은 참 좋은 세상이다"고 말했다.
 
하구언이 막아지면서 좋은 도로가 생겼다. 버스도 다니고 있다. 이제 태평정마을사람들은 30리 산길을 걸어서 독천장에 가지 않는다. 버스나 자가용을 이용해 장을 보러 다닌다.
 
태평정마을 앞에는 적지 않은 농경지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농지다. 그러나 농업용수가 부족해서 조금만 날이 가물어도 한해가 들었다. 건너편 백운동에 태백저수지가 있지만 수량이 부족했다.

"농업용수 넘쳐 물싸움 할 일 없어졌다"

매월리 김기천 씨
미교리 감막례 씨
미교리 서재국 씨
저수지의 물을 터도 물이 저 아래쪽 논까지 가지 못했다.

중간에 물이 이논 저논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그만 가뭄이 들어도 한 마을사람들이 물싸움을 벌였다. 그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구언이 막아지고 곳곳에 간척지가 들어서면서 용수로가 거미줄 처럼 만들어 졌다. 요즘에는 영산강 물이 마르기 전에는 농업용수 걱정할 일이 없다.

마을사람들이 물싸움을 하지 않으니 마을의 분위기도 좋아졌다. 태평정마을 사람들에게 하구언은 자신들의 삶을 참 좋게 바꾸어 준 대사건이었다.
 
석포에서 태평정마을까지 오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을이 있다. 미교마을이다. 아름다운 다리라는 흔치않은 이름이다. 마을사람들은 미교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붙여졌는지 모른다고 했다.

태평정마을주민들이 그늘에 모여 앉아 옛날을 회고하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을과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큰 다리가 들어서고 있다. 목포시관내 국도대체 우회도로 청호~삼호간 4차선도로 공사구간에 들어서는 대교가 미교리와 가까운 학산면 매월리 1구 건지산 자락을 지난다. 다섯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다리가 무척이나 날씬해 보이고 아름답다.
 
또 보성~ 임성간 철도가 놓아지면 미교리 북쪽 지점으로 철교가 건설되는 것으로 설계가 되어 있다. 두 다리가 모두 들어서면 미교리는 남북으로 큰 다리를 끼고 있는 마을이 된다.

요즘에는 다리설계가 밋밋하지 않기 때문에 기차가 지나는 다리도 아름답게 들어설 것이다. 미교리 다운 역사가 아닐수 없다.

옛 조상들이 지어논 지명이 오늘날 영락없이 그렇게 맞아 떨어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름 하나도 헛된 것이 없는 것이다.
 


역사의 순간들 - 1955년 7월 20일 매월리 앞 영산강서 정부미 운반선 전복

백미 1천400가마 수장

학산면 매월리와 여기에서 조금 올라가는 미교리, 조금 더 올라가 거래섬 일대는 영산강 폭이 좁은 곳이다.
 
그래서 다리가 두 개씩이나 건설될 계획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강폭이 좋은 이곳은 물살이 세고, 수심도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안전사고도 많았던 곳이다.
 
1955년 7일 20일 매월리 앞에서는 정부미를 싣고가던 범선이 전복해 백미 1천400가마가 수장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뱃길을 통해 정부미가 이동했는데, 동아일보는 '국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귀중한 정부미가 긴급수송도중 해상사고로 수장했다'고 사회면 주요기사로 보도하고 있다.
 
이 배는 영암 해창에서 정부미를 싣고 목포로 향하던 길이었다. 이 배는 매월리 앞바다에서 심한 썰물로 암초에 부닥쳐 선체가 부서지면서 전복되고 말았다.
 
신문은 '매월리 앞바다는 영산강 하류로 물살이 심하여 언제나 주의를 요하는 곳이고 수심이 20m나 되는 깊은 곳이어서 인양작업도 전혀 가망이 없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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