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쌀 한말도
못먹고 시집가던 사람들
배불리 먹게됐다

 영산강 하류는 바닷물이 들락날락 했던 곳이기 때문에 어업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학산면 석포(石浦)마을 이길남(71)씨도 전문 어부였다. 작은 통통배를 가지고 멀리 영광 칠산앞바다까지 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10여일동안 바다에서 생활을 하며 고기를 잡아 목포에서 팔았다. 석로 돌아온 배는 빈배였지만 호주머니에는 돈이 두툼이 들어있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가족들 생계를 꾸리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을 하고 다녔지요. 그 작은배에 4~5명이 타고 칠산앞바다까지 고기를 잡으로 다녔능께하구언이 들어서면서 이씨의 생활도 완전히 바뀌었다. 배가 멀리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석포앞바다에 장어도 올라오지 않았고, 숭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씨에 따르면 영산호가 완전히 민물이 된 것은 1년이 채소요되지 않았다. 하구언쪽에서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자 영산호의 민물화는 급격히 진행됐다. 자연의 변화는 그렇게 무서웠다. 그러더니 영산호에 민물고기가 급격히 증가했다. 제첩도 갑자기 많아졌다.


붕어나 메기, 쏘가리같은 것들이 갑자기 번성했어요. 밤중에 조용히 들어보면 물고기들이 노는 소리가 막 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더니 곧바로 기형물고기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저안의 물고기 아무도 못먹어요


영산호가 민물화가 되면서 초창기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서식했으나 오염이 가속화되면서 기형물고기가 생기고 개체수도줄었다는 것이다. 이씨는 하구언이 막아진 후 영산호에서 3년정도 고기잡이를 하다가 85년 그 일도 그만 뒀다. 이씨는 요즘에 영산강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은 마을 사람들은 없다고 했다.
이씨는 50마지기의 논농사를 짓는 전업농부가 됐다. 바다란 삶의 터를 잃어버린 사람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이씨는 하구언은 잘 막은 것이라고 했다.


하구언이 들어서 논이 많이 생겼잖아요. 그럼 됐지요 뭐.예전에 쌀이 귀할 때는 먹는게 최우선이었으니까. 갯벌을 잃어버려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 배고픔을 겪은 사람들은 그런말 많이 안합니다
이씨는 최근 건평 112㎡(34평)의 최신 전원주택을 지었다.


왕년에 어부였던 이길남씨는 최근 석포마을에 집을 지었다.
농사를 지어 번 돈으로 집을 지었다고 했다. 방안에는 큰 벽걸이 TV에서 깨끗한 화면의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었다. 왕년의어부이자 이제는 농부가 된 이씨는 편안한 소파에서 리모콘으로 화면을 조정하며 여러 가지 채널을 시청하고 있었다.


석포마을은 지금도 영산강과 가장 가까이 접해 있는 마을이다. 꼬불꼬불 내려오던 영산강이 S자를 만들며 마지막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곳에 석포마을이 있다. 야트막한 마을뒷산으로 오르자 멀리 영산강 하구언이 가까이 보였다. 그만큼목포와 가까운 거리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에서 영산강이 성했던 때와 쇄한 모습을 한눈으로 지켜봤다.

영산강하구둑이 막아지기 전 영산강변 석포마을은 만성적인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석포마을의 이곰례(92), 이소복례(87)할머니 자매는 아주 어릴적에 부모님을 따라 이곳 석포로 이사와서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이웃마을로 시집을 갔다가 나이가 들어 다시 석포마을로 돌아왔다. 이곰례할머니의 집은 영산호에서 물이 치면 금방이라도 마당으로 달려들곳에 있었다. 이소복례 할머니는 건너편에 집이 있는데 언니 보고싶어 날마다 이곳으로 마실을 온다고 했다.


이곰례(좌측. 92), 이소복례(87) 할머니 자매가 영산호와 맡닿아 있는 집앞에서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할머니들에 따르면 석포는 물론 이웃마을 신덕까지도 여자들이 태어나서 시집갈때까지 쌀한말을 못먹고 간다는 말이있었다. 그만큼 쌀이 귀하다는 뜻이다. 또 석포사람들은 이웃매월리에서 물을 길러오느라 매일같이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하구언이 막아지고 농토가 확보되면서 그런 문제들이 해결됐다는 의미다. 할머니들은 그러나 석포숭어는 누웠던 자리 뻘만 먹어도 맛있다고 했는데 그것을 구경조차 할수 없어아쉽다 고 했다.


할머니들은 석포마을이 유명한 돌운반 포구였다고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주 어렸을 적 석포로 이사왔을 때 지금것으로 말하면 케이블카 같은 것이 하늘로 떠다니며 돌을 실어날라왔다. 멀리 독천 뒷산에서 오는 케이블카였다. 지금 동아인재대학이 있는 자리에서 석산이 개발되고 있었다. 두꺼운철줄에 대형 바구니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안에 깨진돌들이 실려 있었다. 하룻네 돌이 실려와 석포항에 쌓였다. 그러면 큰 배가 들어와 싣고 어디론가 떠났다. 두 할머니는 그배가 일본으로 갔는지 인천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고 했다.


이양호 배미자 부부.
마을주민 이양호(73), 배미자(63)씨 부부는 밭에 다녀온길이였다. 이씨는 석포에서 태어나 석포에서 자랐고, 석포에서 늙었다고 했다. 이씨도 어부였으나 지금은 40마지기의 논농사를 짓는 농부가 됐다.


이씨는 독천장날이면 건너편 무안 일로읍 생기미에서 거룻배에 소를 싣고 건너오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영암의 독천장은소시장이 크게 섰기 때문에 무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를 팔거나 사려고 건너왔다. 강을 건너던 유일한 수단은 나룻배였다. 사람들이 나룻배에 2~3 마리의 황소를 싣고 건너와 줄을 지어 독천장으로 가곤 했다.


이씨 역시 영산호의 오염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씨는 물밑에 온통 쓰레기가 쌓여 있어요. 누가 그랬겠어요. 상류에 사는 사람들이 떠내려 보낸 거제영산강 하류쪽에는 장마철이되면 지금도 쓰레기 천지가 된다. 어쩔때는 산 돼지가 떠내려 오기도 있고, 커다란 냉장고가둥둥 떠내려 오는 것은 다반사다. 그것들이 모두 영산호 바닥에 가라 앉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씨는 지금도 하구언이 막아지지 않았어야 한다고했다. 왠만한 것들은 바다로 씻겨 내려가 정화될 것들이 하구언 때문에 떠내려가지 못하고 모두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하구언은 상류에서 떠려오는 것을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하지만 바다에서 상류로 올라오는 바닷고기들을막아서고 있다. 이씨에게 영산강 하구언은 모든 것을 틀어막고 있는 장벽이었다.


이씨는 그 좋은 바다를 왜 막았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하구언이 막아지지 않았다면 내가 훨씬 잘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석포는 목포와 가까워서 교통이 편리하고, 영산호와 인접해 있는 곳이라 풍광이 좋은 곳이다. 덕분에 이곳저곳에 새 집이 많이 들어서고 있었다. 요즘말로 전원주택들이었다.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집을 지으면 영산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 많았다.


과거 나룻배가 무안으로 건너가던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석포는 영산호를 가로질러 마을 위쪽으로 커다란 다리가 건설되고 있다. 영암과 무안을 잇는 무영대교라는 큰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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