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서울로 가는 5대 관문

▲ 예전 용당포구에서 철선이 닿던 자리에는 해군부대가 들어서 군함들이 도열해 있다.
지난달 29일 오후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 구 선창마을 입구. 승용차를 타고 직선도로로 들어가자 군인들 길을 막았다.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민간인들은 더 이상 들어 갈 수 없었다.

이곳이 바로 영암과 강진, 장흥, 해남, 완도등 5개 지역 사람들이 목포로, 또는 서울로 가던 관문이었던 선창마을이다. 1978년 영산강 하구둑이 설치된 후 수백년 동안 이어오던 선창의 기능은 멈춰섰다. 사람들은 차량을 이용해 하구둑을 건너 목포를 오갔다. 2007년에는 해군시설이 들어오면서 이곳을 지키며 살던 주민들도 뿔뿔히 흩어졌다. 5대 관문(5개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던 통로)으로 통하던 선창마을은 영영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영암과 강진, 장흥, 완도등의 나이 지긋한 주민들은 용당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용당에서 철선을 한번쯤 타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까. 필자도 초등학교때 어머니를 따라 목포 해봉사에 가면서 이곳에서 철선을 탔던 기억이 생생하다. 금성여객과 광원여객이 쉴세없이 손님들을 내려 놓으면 4~5척의 철선이 쉬지 않고 건너편 목포땅으로 손님을 실어 날랐다. 나물 팔러가는 사람들, 공산품 사러가는 사람들, 제주도에 가는 사람들, 추자도에 멸젓사러 가는 사람들, 학교에 가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오는 배도 그랬다. 빽빽이 사람을 싣고 부두를 떠난 철선은 반대편 목포항에 사람들을 내려놓고, 꼭 그만큼의 사람들을 다시 태워 돌아왔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들이 그 사람들을 태워 영암과 강진, 장흥, 해남, 완도등으로 사라졌다. 하얀 흑먼지가 안개처럼 뿌옇게 마을을 감쌓다.

▲ 임금자씨
선창마을에서 태어나 이웃 원용당마을로 시집간 임금자(여. 67)씨는 "부두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고 했다. 임씨는 목포에 가기 위해서는 영암과 강진등지의 사람들에게 이곳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고 회고했다. 원용당마을은 선창마을과 엎드리면 코 닿을 위치에 있다.

용당은 지리적으로 선창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강은 땅을 가르며 흐른다. 120여㎞를 달려 온 영산강은 영암땅과 건너편 목포땅을 먼 거리로 벌려 놓았다. 사람들은 목포와 가장 가까운 지점을 찾았을 것이다. 그곳이 용당이다. 용당은 영암땅이 목포를 향해 툭 튀어나간 곳에 있다.

용당에서 건너편 목포항까지는 1.5㎞정도에 불과하다. 이곳은 강의 외곽에 위치해 있어 상대적으로 물살이 약한 곳이다. 썰물 때면 시종면 쪽에서 내려는 물살이 아주 쌨기 때문에 상류쪽은 배를 대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목포시내가 지척이고 물살도 적당한 용당은 부두를 만들기에 제격이었다.

▲ 윤복만씨
아주 오래전 사람들을 돛배를 타고 이곳을 건넜을 것이다. 일제 시대때는 기선이 들어와 기동력을 보강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철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용당마을 윤복만(64)씨는 삼학호란 배가 1호부터 7호까지 있었고, 80년대 초반까지 2차대전상륙작전에 투입된 배를 개조한 재건호란 배도 있었다 고 말했다.

선창마을을 중심으로 한 재미 있는 사연도 많다. 선창마을은 바닷가 마을이었기 때문에 식수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인근 마을 사람중에 선창마을에 물을 팔아서 먹고 산 사람들도 꽤 있었다.

양쪽에 물통이 달린 물지게를 지고가면 한통에 20원을 받았다. 어느때 들어 물지게가 사라지고 리어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선창마을은 70년대 후반 상수도가 보될 때까지 그렇게 물을 사서 먹었다. 그래서 선창마을에 가면 막걸리는 공짜로 얻어먹어도 물 한모금은 돈 없이 못마신다는 말이 생겨났다.

부두 바로 옆에 집이 있었던 임금자씨는 지금도 옛날 모습이 선하다. 첫 배는 아침 6시에 출발했다. 목포 새벽시장을 보러가는 주민들이 줄을 섰다. 첫배를 타기 위해 인근 여인숙에 서 하룻밤을 묶은 사람들도 인파에 뒤섞였다. 식당들은 일찍부터 문을 열고 국밥을 끓였다. 겨울이면 식당앞 연탄화덕 위의 솥단
지가 김을 푹푹 쏟아냈다. 사람들이 마치 안개속을 헤쳐나가듯 국밥집앞을 지나갔다.

멀리서 온 사람들은 그나마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었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걸어왔다. 가지, 신촌, 메밀항, 엄포, 아산, 산음등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랬다. 여름에는 수박과 참외를 머리에 이고 십리가 넘는 길을 줄을 지어 걸어와 첫배를 탔다. 막배는 밤 9시 30분에 도착했다.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막배를 많이 이용했다. 그나마 목포에서 막배를놓친 사람들은 똑딱선이라는 배를 타고 들어오기도 했다. 개인들이 운영하는 배였다. 윤복만씨의 부친은 배를 몇척가지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늦게 끝나
막배를 놓치면 자신의 배를 이용해 학생들을 무료로 실어 오곤 했다.

선창마을 부두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갔지만 유흥업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바닷가 선창이면 흔히 있을 색시집도 없었다. 숙박업소도 그랬다. 여인숙 한 곳 정도가 전부였다. 지척에 목포란 거대한 유흥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뱃길로 15분만 가면 좋은 곳 이 많은데 굳이 용당에서 놀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용당에 있는 업소는 식당과 간이술집 정도가 전부였다. 선창부두를 통해 들어온 것은 사람뿐이 아니었다. 60년대말까지만 해도 비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최고의 비료는 인분이었다. 집집마다 인분통과 소변통을 따로 두고 삭혀서 거름으로 사용하던 시절이다. 농민들 입장에서 목포는 '비료' 의 보고였다.

지금의 삼학도 주변에 작은 섬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똥섬이라고 불렀다. 목포시내 인분이 이곳에 집결됐다. 인분이 모아지면 이를 전문적으로 실어나르는 똥배 가 따로 있었다. 목선을 개조해 만든 배였다. 똥배가 용당 선창부두에 자주 들어왔다. 바다를 건너온 인분은 부두 주변 개인 저장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삭힌 다음 농사철이 되면 통에 담아 짊어지고 가곤 했다. 60대말까지 선창부두에 똥배가 들어왔다.

▲ 임삼례씨
요즘 용당 일대는 산천이 바뀌었다. 목포에서 삼호공단으로 향햐는 8차선 도로에는 대형화물차가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곳곳의 카센터와 낚시점이 손님들을 부르고 있다. 토박이들은 쪼개진 땅에서 집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용당교차로 주변에서 살고 있는 임삼례(여· 73)할머니의 집은 언덕이 되어 있다. 마당이 수직으로 깍이고 그곳에 8차선 도로가 지나갔다. 해남에서 시집와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는 임할머니는 "용당에서 목포로 철선이 다닐 때는 날마다 푸성거리를 가져가 팔았는데 지금은 그런 수입이 없다" 며 "날마다 사람이 북적거리던 선창이 자주 생각난다" 고 말했다.    글 사진=주희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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