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의 중심지 추정... 곳곳에 웅장한 고분
전남 내륙과 해양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요지

 

남해포 앞으로 삼포강이 흐른다. 영산강 하구둑이 막아지기 전까지는 저 들판이 모두 바다였다. 지금은 삼포강이 조그만 실강이 되어 흐른다. 지난 1일 오후 멀리 무안 몽탄쪽으로 저녁해가 지고 있다.

1010년 어느날 밤 고려 현종 임금은 꿈을 꾸었다.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지금 빨리 바다를 건너 피신하라고 했다. 현종은 밤중에 바다를 건너 목숨을 구했다.

현종이 잠을 자며 꿈을 꾸었던 곳이 영암 시종면 옥야리 남해포였고, 밤중에 바다를 건너 닿은 곳이 무안군 몽탄이었다. 현종은 거란족이 쳐들어와 남쪽으로 피신중이었다.

훗날 현종은 남해포에 남해신당을 짓게하고 자신을 구해준 남해신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제사는 영암과 강진, 나주, 영광, 함평의 수령들이 돌아가면서 지내게 했다. 남해포에 지금도 남해신사가 있다.

남해포에서 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옥야리 야산. 10여개의 커다란 무덤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옥야리 고분군이다. 옥야리 주민들은 어릴적에 눈이오면 고분에서 썰매를 탔다.

그곳이 고분이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어른이 다되고 나서였다. 1970년대 초반 발굴작업이 진행됐을 때 이곳이 마한시대 지배세력의 독무덤이라는게 밝혀졌다.

영암군에는 40개 지역에 150기의 독무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시종면을 중심으로 25개 군 100여 기가 모여 있다. 특히 남해포와 가까운 내동리 신연리 옥야리에 28기가 분포되어 있다.

지금은 포구란 이름이 낯설은 지역이 되어버린 남해포. 그옛날 남해포에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김점수 시종면발전협의회장(우측)과 강은희 마한문화공원관리담당이 남해신사를 보강해 복원할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지난 8일 옥야리 마한문화공원. 김점수 시종면발전협의회장과 강은희 마한문화공원 관리담당의 안내로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 남쪽에 남해신사 건물이 보이고 서쪽으로 끝도없는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1982년 영산강 하구둑이 막아지고 간척사업을 하기전에는 저 들판은 바다였다.

이름도 있었다. 남해만. 하루 두차례씩 민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양질의 갯벌을 유지했다.

이곳에서 나는 수산물은 최고였다. 목포대학교박물관이 지난 2001년 발행한 마한문화공원조성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란 책자에는 이 일대 지리적특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시종면 옥야리 일대는 과거 남해만으로 둘러쌓인 반도형의 낮은 구릉지대로서 영산강을 타고 흐르는 해수와 삼포강의 담수가 만나는 여울목에 해당한다. 특히 남해신사 제사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남해포는 1950년대까지도 여객선이 왕래하던 포구로서 일찍부터 바다와 전남의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였다.<위책 13페이지 참조>

남해포의 이장인 김상근씨는 이곳에서 3대째 살았다

남해포 이장이면서 이곳에서 3대째 살고 있는 김상근(63)씨는 "숭어, 장뚱어, 낙지를 잡아 목포시장으로 가서 팔면 중간상인들이 물건을 낚아채다시피 하며 사가 버렸다"고 당시를 회고 있다. 왠일인지 물고기들은 육지 가까운 곳에 알을 낳는다.

아마도 육지에서 유입되는 풍부한 먹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수와 삼포강의 담수가 만나는 여울목에는 엄청난 먹이가 서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은 해안선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이다. 남해포는 남쪽 바다에서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서는 영산강이 내려와 바다와 만나고, 남쪽으로는 전국으로 이어 지는 바다가 있다. 목포에서 이곳을 오려면 한참을 올라와야한다. 목포와 거리가 20㎞ 정도다.

이런 곳은 바다고기만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였다. 영산강하구둑이 막아지기전 남해포 일대 지도를 보면 꼬불꼬불한 해안선이 장관이다. 바다의 요새가따로 없다. 이곳은 외부세력이 함부로 넘 볼 수 없는 지역이다.

길을 모르고 함부로 들어왔다가는 해안선 곳곳에 매복해 있는 군사들에게 떼죽음을 당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무엇보다 남해포는 영산강 본류가 아니다.

목포에서 영산강을 따라 북진하는 외부세력은 본류를 따라 나주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지류에 있는 남해포는 절묘하게 환란을 피할 수 있는 지형적 구조를 하고 있다.

남해포 주변에 마한의 묘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이곳이 지정학적으로 외부세력을 방어하는데 매우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라왕의 큰 묘들이 수도 경주에 자리잡고 있듯이, 마한의 큰 묘들이 남해포 주변에 자리한 것은 이일대가 과거부터 부족국가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남해포는 고대에서부터 이미 왕족이나 왕족에 버금가는 세력이 자리잡을 수 밖에 없는 지리적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던게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은 백제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시대후에는 통일신라가 출현하고, 그 후에는 고려시대다. 고려 현종이 개경에서 전라도까지 피난을 왔던 절박한 시간에 남해포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유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왕이 피신할 정도의 지리적 잇점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왕의 피신을 도울 수 있는 지방세력이 고려시대에도 남해포 주변에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일이다. 남해포의 역사적 기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영산강하구둑이 막아지기전까지 계속된 역할을 파악하면 접근이 쉬워진다.

'마한문화공원조성지역내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란 책자를 다시 인용해 보면 일제시대들어 남해포는 영암과 나주에서 걷어들인 미곡을 실어 나르는 항구로 크게 발달했다.

육로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일대에서 걷어들인미곡을 목포로 수송하는 곳은 남해포밖에 없었다. 목포항은 일본으로 쌀을 싣고 가는 큰 기지역할을 하고 있을 때다.

남해포가 미곡을 수송하는기능이 활성화되고 기타항과 물류교환장으로 발달하면서 이곳에는 정미소가 번창했고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술집도 성시를 이뤘다.

남해포는 해방후에도 목포나 해남등으로 나가는 관문기능을 충실해 했다. 광전교통이란 버스가 남해포까지 들어왔으며 기선이 하루에 한번 씩 목포와 남해포사이를 운항했다.<위의 책 56페이지 참조>

주민들의 증언도 이어진다.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 책자에는 남해포에 여객선이 들어선 것이 1950년대까지 였다고 했지만 남해포 주민들에 따르면 1982년 영산강하구둑이 막아지기전까지 배가 다녔다.

배는 목포에서 서호~구산~남해포~동강등 네 곳을 거쳐 올라와 다시 목포로 내려갔다. 보통 배에는 50~60명 정도의 사람들이 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해포 주변 사람들이 목포로 가는 방법은 뱃길이 유일했다.

영암문화유적관리사업소 박태홍 소장은 고대항구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을 5가지 정도로 설명했다. 첫째는 물건을 팔수있는 배후도시가 있어야 하고, 배를 비우면 물건을 실어 다시 떠날 수 있도록 재선적 화물을 공급 할 수 있어야 했다.

또 선박을 수리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 있어야 했고, 포구 주변에 식수가 있어야 했다. 특히 고대에는 항구를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남해포는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 몇 안된 포구였다. 주변에 마한세력을 중심으로 부족국가가 옹거하고 있었고, 이 도시는 멀리서 수송해온 화물을 소비할 수 있는 인구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곳에서 생산된 제품을 다시 싣고 떠났을 것이고, 각 부족의 군사력이 이해관계를 가지고 포구를 지켰을 것이다.

남해포에는 남해용왕에게 제사를 올리던 남해해신사가 복원돼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남해포에는 절묘하게 작은 샘물이 있다. 마을사람들이 용왕샘으로 부르는 곳이다.

지금의 남해신사 남쪽아래에 있는 샘인데, 옛날 포구에 정박했던 배들이 이용한 샘물로 추정되고 있다.

박태홍소장은 "남해포 일대는 이같은 천혜의 조건 때문에 많은 배들이 모여들었을 것이고 이곳을 항해하는 뱃사람들이안전항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고말했다.

남해포 주민들은 "영산강 하구둑이 막아진 후 바다를 잃어버렸고 사람들도 떠나 버렸다. 모든게 변해 버렸다" 고 아쉬워했다. 남해포는 바다를 잃어버렸으나 마한문화공원이라는 조그만 관광지가 들어섰다.

남해포는 요즘 다시 태어날 채비를 서서히 하고 있다. 시종면에는 영산강수질과 뱃길을 복원하자는 추진위원회가 구성돼있다. 김점수 추진위 위원장은 "영산강 하구둑이 들어선 후 악화된 수질을 개선하고 주변을 관광지로 개발하면 이 일대는 전국적인 관광지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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