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77]
■ 구림마을(86)
우암 송시열이 쓴 묘갈명
지난 호에 문곡 김수항이 지은 태호공에 대한 묘지명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묘갈명(墓碣銘)을 소개한다. 묘갈명이란 묘소 앞에 세우는 비에 새긴 글을 말한다. 죽은 사람의 공업(功業)을 현양(顯揚)하는 내용을 위주로 쓰며, 끝에 명(銘)을 붙이는 것이 통례이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정승을 지낸 문곡과 우암이 묘지명과 묘갈명을 나란히 썼다는 것만 봐도 태호 조행립이 그 시대에 얼마나 존경받는 선비였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학자들의 문체를 비교하면서 감상할 수 있어서 많은 공부가 된다. 글이 길어서 자제분들에 대한 설명 부분은 생략하였다.
첨지중추부사 조공 묘갈명
공의 휘는 행립이고 자는 백원이다. 13세 때에 왜구의 침입(임진왜란)을 만났는데 그 당시 부친인 도사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공이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영암으로 피난하였다. 정유년에 왜구가 재차 침입하여 백씨(伯氏)가 흉봉(凶鋒)에 죽자 공은 몰래 소제(少弟)를 업고서 달아났는데 적이 뒤를 쫓아와 사로잡혔다. 이에 형제가 서로 버티면서 자신이 죽겠다고 하자 왜적이 차마 가해하지 못하여 마침내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으나 소제는 끝내 도중에서 죽고 말았다.
이에 공은 형과 아우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모부인을 모시고 표친(表親)에게 가서 의지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남곽 박동열 공에게 수업하였으며 상란(喪亂)을 막 겪은 뒤였는데도 글을 잘 지어 과거 공부를 하였다. 광해군 때에 이륜이 무너져 막히고 또 사대부들이 원통한 죄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공은 서울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아니하여 마침내 호남으로 영영 돌아갔다.
거처하는 곳에 강호와 금어(禽魚)의 즐거움이 있어서 어머니에게 물심양면의 효성을 다하고 빠뜨린 것이 없었다.
인조가 즉위하여 유일(遺逸)과 침체된 자들을 수용하자 공도 빙고와 활인서의 별제에 잇달아 제수되었고 전례에 따라 직장으로 옮기었으며 국장도감의 감조관에 겸차되었는데 그 공로로 6품직에 승진하였다. 이어 사헌부 감찰을 거쳐서 태인현감이 되었는데 자신을 검속하고 부하들을 단속하자 이서들이 공을 두려워하여 감히 비리를 저지르지 못하였으며 얼마 뒤에 체직(遞職)되어 돌아왔다.
그 무렵에 조정에서 구관청을 설치하였는데 공은 그 종사관이 되어 강도(강화도)의 이로움과 병폐에 대하여 극력 말하였는바 병자년에 이르러 공의 말이 정말 그대로 증명되었다.
이어 내섬시(內贍寺) 주부와 금천 현감을 지낸 뒤에 곧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갔으며 얼마 안되어 어머니상을 당하였다. 그 당시 공의 나이가 이미 많았는데 복상(服喪)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삼년상을 마쳤으나 또한 병이 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신명이 도와주어 그런 것이라고 말들을 하였다. 이어 평시서 영으로부터 익산과 온양 두 군을 맡아 다스리면서 학문을 권장하고 이익을 일으키기에 힘을 썼는데 처음에는 번거롭고 가혹한 것처럼 여기었으니 사민들이 결국에는 공을 믿고 복종하였다.
공은 강명(剛明)함을 자임하고서 호강(豪强)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모두에게 칭송을 받을 수가 없어서 해직되었다가 오래 지난 뒤에 다시 서용(敍用)되어 군기시 첨정(軍器寺 僉正)이 되었고 한 해 남짓 뒤에 사직하였으니 대체로 임천(林泉)에서 느긋하게 지내려는 것이었다.
이미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시골의 자제(子弟)들과 더불어 향약을 설립하여 풍속을 돈후하게 하였다. 효종 기해년(1659)에 공의 연세가 여든이 되자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관질(官秩)에 승진하였고 그로부터 4년 뒤인 계묘년(1663)에 첨지중추부사로 세상을 마쳤다.
공은 마음씨가 성실하여 부화(浮華)를 탈피하였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행동하고 남에게 아부하거나 흔들리지 않았으며 또한 비난이나 칭찬에 동요되지 않았다. 집안에서의 행실도 성의가 있고 독실하여 고아나 과부를 더욱 보살피고 도와주었으며 공이 부임하는 곳마다 관청의 사무가 제대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많았는데 이 때문에 일찍 재능이 있다고 칭송을 받았으나 관직이 그다지 현달(顯達)하지 못하였으며 만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의 소화산에 별당을 짓고서 맑고 깨끗한 시내와 골짜기의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숲속에서 살았다.
매양 날씨가 좋거나 명절이 되면 자제들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반백이 되어 공에게 술잔을 올리며 즐겁게 모시었는데 공은 정신이 또렷하여 노쇠하지 않은 채로 꼿꼿하게 앉았다가 일어났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과 같았다고 하였으며 관직에 있는 사대부로서 그곳을 지나는 자들은 공이 있는 곳에 존경을 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청복(淸福)을 누린 기간이 10여 년이나 되었으니 공은 그야말로 세간에 드물게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만하다.
공의 부인 김씨는 청도의 현족으로 부인의 아버지는 김윤선이고 벼슬은 별좌이다. 부인은 아내로서의 부덕을 갖추어 훌륭한 평판이 있었고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일에 조리가 있었는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부장(附葬)하였다. 묘소는 용인 소재지 진산의 갑좌(甲坐) 묏자리에 있다.(중략)
공은 일찍이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문경공 김집과 사이좋게 교유하였는데 문경공이 모년(某年)에 일찍이 말하기를 “친구 중에는 조모(曺某)만 남아 있을 뿐이다”고 하였으니 그와 더불어 사귄 사람을 살펴보면 공에 대하여 알 수가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살기 좋은 남쪽 땅에
월출산이 솟아 있고
호수와 바다가 둘러싸고 있어
어진 사람의 마음처럼 넉넉하도다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돌아와서
느긋하고 한가하게 지내셨네
종을 울리고 밤길을 돌아다니는
저 자들은 어떤 사람인가
공에 대하여 알고 싶거든 이 글을 살펴볼지어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송시열 짓다<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