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76]
■ 구림마을(85)
제전을 받들어 올리는 글(祭田奉約書)
-병술년(丙戌年)(1946년) 다시 세운 뒤 구림대동계-
봄 햇살이 따뜻합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히 잘 계시는지요?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태호 조선생의 문장과 도덕은 백세의 모범이 되며, 본계(本契)의 규모를 모두 갖추고 조례를 명확하고 엄숙히 한 것은 선생께서 처음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존경하고 사모하는 도리를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된 나머지 제수를 올리는데 돕지 못하기에 현재와 과거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개탄스러운 감회가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제 제전을 받들어 올리면서 삼가 변변찮은 정성을 알리오니 두루 헤아려 용서하시기 바라며 갖추지 못하고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무자년(戊子年)(1948년) 2월 초6일
구림 대동계 계장 최병찬, 이회정, 최병륜, 공사원 최병규
다음은 문곡 김수항이 쓴 태호공 묘지명(墓誌銘)이다. 이 글을 읽어보면 조행립의 생전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묘지명은 죽은 사람의 사적(事績)을 돌이나 사기에 새겨 무덤 앞에 묻는 글이다. 지(誌)와 명(銘)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하며, 지는 산문으로, 명은 운문으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첨지중추부사 조공(曺公) 묘지명
을묘년(1673년 숙종 1년)에 내가 호남으로 귀양을 가서 영암 구림리에 붙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돌아가신 첨지중추부사 조공의 은거지이다. 당시 조공이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되었고 그의 여러 자제가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 동리 가운데 회사정이 있으니 향약과 향음주례를 가다듬는 곳이다.
그리고 또 곧장 몇 리쯤 되는 곳에 서숙(書塾)을 건립하여 스승을 배치하고 마을의 수재를 모아 가르치니 모두 조공께서 창설하여 풍속을 두텁게 하고 인재를 양육하려는 것이라고들 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조공에 대한 일을 거침없이 말하기를 친절히 되풀이하면서 멈추지 않았다.
곤궁하고 나약하여 하소연할 데 없는 자는 또한 모두 그 은덕과 혜택을 추모하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조공처럼 우리를 입혀주고 먹여주는 분을 얻겠는가?” 하였다. 장로들은 또 나를 위하여 말하기를, “조공이 늙어서 돌아왔을 적에 행위를 관찰하심이 오히려 쇠퇴하지 않아 좋은 날 좋은 때면 번번이 희생(犧牲)(제사에 쓰이는 가축)과 조류(鳥類)와 생선을 마련하고 술을 가져오도록 명하여 친인척과 친구를 불렀다. 자손들을 따르게 하여 가벼운 대가마(輕籃)와 작은 배를 타고 산과 바다를 극진히 즐기니 바라보면 신선과 같았습니다.” 하였으니, 공은 참으로 선인(善人)이며 복인(福人)이시다.
내가 듣고 마음속으로 부러워하면서 조공이 살아 계셨을 때 한차례 장수를 기원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얼마 뒤에 공의 여러 자제들이 손수 공의 가장(家狀 한 집안의 조상 행적을 기록한 문서)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사양하여도 받아 들여지지 않아 그 가장을 펴서 읽어보니 공이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왜적이 침입할 때를 당하여 형제가 모두 잡혔지만 서로 죽기를 다투자 왜적 또한 차마 해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백형과 어린 동생이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들판에서 운명하였으므로 그 몸이 다하도록 마음 아파하고 슬퍼했다. 그리고 모부인(母夫人)을 섬김에 있어서는 뜻을 봉양하며 일 처리를 잘하였다. 그러다가 상(喪)을 당해서는 연세가 60세였는데도 몸이 바싹 여위도록 슬퍼하기를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하니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사람됨이 체격이 훤칠하고 뜻이 크면서 재능이 뛰어나고 작은 예절에 박절하지 않아 의로운 일에 달려가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교유하는 상대는 모두 현인과 호걸스런 장자(長子)들이었다.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일을 처리한다고 일컬어졌으며, 더욱 번거로운 정무를 잘 처결하여 조용히 처리하면서 여우가 있었기에 한때에 추중(推重 높이 받들어 귀하게 여김)하여 걸출한 재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강직함을 자신하였으므로 법을 굽혀가면서 사람을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로 말미암아 이르는 곳마다 자주 곤궁과 막힘을 당하였고, 또한 그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없었으므로 아는 분들은 모두 그것을 애석하게 여겼었다.
내가 여기에서 또한 조공이 집안에서 가다듬고 관아에서 시험한 것이 이와 같이 우뚝하니 고을 사람들이 오래도록 더욱 사모하는 것이 마땅함을 알겠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행립이고, 자는 백원이며, 관향은 창녕으로 고려 대악서 승 조겸의 후손이다. 조선조에 정국공신으로 책록되어 종부시 정(宗簿寺正)이 된 분으로 계은이 계셨으니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는 별제를 지낸 응경이며, 조(祖)는 판관을 지낸 세준이고, 고(考)는 도사(都事)를 지낸 기서이다. 어머니는 임씨(林氏)로 세계가 선산(善山)에서 나왔고, 예조 정랑을 지낸 임혼이 그 아버지이다.
공이 젊어서 과문(科文)을 익혀 여러 차례 응시하였지만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인조 초년에 처음으로 입사하여 빙고와 활인서, 평시서 영, 군기시 첨정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태인과 금천의 현감, 익산과 온양의 군수를 지냈다. 그리고 효종 10년(1659년)에 연세가 높다고 하여 첨지중추부사로 승질(陞秩)하였다. 1663년(현종 4년) 5월에 졸하였는데, 처음에 광주(廣州)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용인의 금화산 갑좌의 터로 이장하였다. 부인은 청도 김씨로 부장하였으며, 부인은 별제 김윤선의 따님으로 아름다운 덕이 있었고 집안을 법도로 다스렸다. 공보다 15년 먼저 몰(歿)하였다. 5남 1녀를 낳으셨는데, 남 경빈은 군수이고, 경위·경찬·경한·경보인데 모두 돈독한 행실과 가풍이 있었다. 딸은 정공필에게 출가하였다.(중략)
임씨(林氏)가 대대로 영암에 살았으며, 공이 젊어서부터 외가에 의탁하였다가 광해군 때에 이르러 한성에서 거주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 마침내 온 가족이 남쪽인 영암으로 옮겼으며, 늦게 소화산 아래를 골라 별장을 지었으니 더욱 경치가 좋았으며 공이 실제로 여기에서 고종(考終)하였다. 구림 사람들이 공을 사모하기를 그만두지 못하여 곧장 마을 가운데 사우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으니, 어찌 옛날에 이른바 세상을 떠나고서도 사(社)에다 제사를 지낼만하다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젊어서 집안에서는 효자이셨고
장성해 관청에서는 어진 관리였었고
늙어서 고을에서는 진실로 장자이셨네
복이 완전함이 마땅하고
오래도록 장수함이 마땅하며
자손이 번성하고 많음이 마땅하네
소화산 아래 집을 짓고 사셨고
금화산에 산소가 모셔졌으니
공의 신령 편안하지 않음이 없도다
문곡 김수항 짓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