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73]
■ 구림마을(82)

회사정 마루에서 건너다본 서호사 전경. 군서천을 사이에 두고 서호정마을과 남송정마을이 경계를 이룬다. 회사정은 서호정에, 서호사는 남송정에 속한다.
회사정 마루에서 건너다본 서호사 전경. 군서천을 사이에 두고 서호정마을과 남송정마을이 경계를 이룬다. 회사정은 서호정에, 서호사는 남송정에 속한다.

서호사(西湖祠) 가는 길
동계리 고죽기념관을 나와 홍랑과 고죽의 시비를 다시 한번 읽어본 후 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백여 보를 걸어 작은 다리를 건너면 맞은편에 죽림정이 보인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이순신 장군 어록기념비(약무호남시무국가)와 군립하정웅미술관이 나오고 백여 보를 더 걸으면 울창한 송림 속에 자리한 회사정이 나온다. 회사정 솔숲은 언제봐도 장관이다. 용트림하듯 힘차게 몸통을 비틀어 솟구쳐오른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웅장한 기상과 태고의 신비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소나무 숲을 지나 회사정 마루에 오르면 대나무 마디로 난간을 장식한 품격있는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다리 앞에는 서호사 입구라고 새겨진 표지석이 서 있다. 다리를 건너면 우측에 ‘태호선생기념관’이 나오고, 좌측에는 서호사와 서호사 강당인 총취정이 자리하고 있다. 외삼문에는 ‘취정(翠亭)’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해공 신익희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서호사의 연혁
서호사는 태호(兌湖) 조행립(曺行立 1580~1663)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祠宇)이다. 원래 군서면 서구림리 신흥동에 태호사(兌湖祠)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었다가 1677년(숙종3)에 서호사란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출처 영암디지털문화대전) 태호사는 조행립의 호를 따서 사우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우는 『서원가고(書院可攷)』와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에는 서호사로 기록되어 있고, 『문헌비고(文獻備考)』나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구림사(鳩林祠)로 기록되어 있다. 태호사가 서호사와 구림사로 언제 개칭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현재는 서호사라고 불리고 있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의 영향으로 훼철되었다가 1946년 군서면 서구림리 남송정마을로 이건되었다. 서호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외삼문을 지나면 경내에 서호사 강당인 총취정이 있다. 『서호사우 사적(西湖祠宇事蹟)』, 『태호집(兌湖集)』 2책 등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열읍 원우 사적(列邑院宇事蹟)』에 수록된 『서호사우 사적』은 서호사에 배향된 조행립의 행적을 기록한 첨추 조공 사실(僉樞曺公事實)과 서호사 관련 제문(祭文), 통문(通文), 개기 축문(開基祝文), 상량문(上樑文),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행립의 문집인 『태호집(兌湖集)』은 총 2권 2책으로 1973년 후손들이 간행하였는데, 서문을 송재직(宋在直)이 쓰고 발문은 조행립의 12대손인 조영현(曺永鉉)이 작성하였다. 시(詩), 잡저(雜著), 행장(行狀), 제문,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지은 사우 
서호사는 구림 대동계에서 조두 제물(俎豆祭物)을 보냈던 사우로 태호 조행립의 공덕을 기리어 마을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직접 지은 뜻깊은 건물이다. 문곡 김수항이 지은 태호공 묘지명에 “구림 사람들이 공을 사모하기를 그만두지 못하여 곧장 마을 가운데 사우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으니, 어찌 옛날에 이른바 세상을 떠나고서도 사(社)에다 제사를 지낼만하다는 경우가 아니겠는가?”라는 기록이 나온다. 태호 조행립이 생전에 지역사회를 위해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를 능히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구림 대동계 기록을 보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구림 대동계 동헌추록(洞憲追錄)
온 마을에서 사우를 동리의 가운데에 창건하고 (옛날에 동계가 있었으나 정비되기도 하고 폐지되기도 함이 일정함이 없었고 일찍이 마을에 서당이 없어 문화에 관한 교육이 전혀 없었는데, 조 첨지중추부사(조행립)께서 동장이 되어 병술년(1646년, 인조 24년)에 다시 가다듬고 확장하여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죽은 사람을 위하여 상사(喪事) 치르기를 유감없게 하였고, 또 정유년(1657년, 효종 8년)에 학교를 설치하여 교육하고 계도하여 후진으로 하여금 성취하는 바가 있도록 하였으므로 동리 사람들이 공(功)에 감동하고 덕을 우러르게 되어 정사년(1677년, 숙종 3년)에 사우를 건립하여 향사를 받들었다) 봄가을 향사에 쓸 제수를 의당 향사 때마다 갖추어 보낸다. 
쌀 3되, 기장쌀 3되, 밤 2되, 계복(鷄卜) 1마리, 무김치 1그릇, 사슴 젓 1그릇, 황촉 1쌍, 일척향 1봉, 폐백 1감(예척으로 3자), 편포 3조, 축문지(부채 만드는 종이) 1장, 붓 1자루, 먹 1홀, 술쌀 1말을 유사(有司)가 정결하게 준비하여 감독해서 봉하여 단자(單子)를 쓰고 서명하여 정재일에 사우에 보낸다. 그리고 술쌀은 미리 보낸다. 신미년(1691년, 숙종 17년) 봄에 의논을 완정함.

뛰어난 학식과 인품의 소유자
도선국사 탄생 설화와 관련하여 구림(鳩林)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이후로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천혜의 입지 조건 때문에 마을은 나날이 번창하였고 뛰어난 인물들이 여럿 배출되었다. 
특히 16세기 중반에 선산인 임구령이 구림마을에 입향하여 서호정 국사암 곁에 요월당을 짓고 동호리와 양장 원머리 사이에 제방을 쌓아 모정리 앞에 간척지를 조성한 이후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월당 임구령은 모정마을 연못가에 쌍취정을 지어 풍류와 담론의 장소로 활용했고, 그의 장남인 구암 임호는 회사정을 짓고 대동계를 창설하여 구림마을의 문예부흥을 이끌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병화로 회사정은 소실되고 대동계도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때 태호 조행립이 구림마을에 정착하여 다시 회사정을 중창하고 대동계를 일으켜 세웠다. 마을에 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향음주례와 향약을 실시하여 주민들의 친목과 화합을 도모케 하였다. 태호공의 뛰어난 학식과 인품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그의 지행합일의 실천 정신은 지역 발전과 화합의 초석이 되었다. 선산인 임구령과 임호에 이어 구림마을 제2의 문예부흥을 이끈 청렴한 선비 태호 조행립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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