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52]
■ 구림마을(61)
철원 유배에서 풀려나 영의정에 오르다
1678년 영암에서 강원도 철원으로 이배(移配)되었던 문곡은 머지않아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남인 출신 영의정 허적이 자신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비가 오자 왕의 허락 없이 궁궐의 기름 천막을 함부로 가져다 썼다가 숙종의 분노를 샀다. 숙종은 영의정 허적을 해임함과 동시에 김수항을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유배령이 취소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제수된 뒤, 숙종(肅宗) 6년(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영의정이 되어 정국을 이끌어갔다. 1681년부터는 현종실록의 편찬 총재관이 되어 실록 편찬과 감수를 맡아보았다. 그 후 8년간 의정부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숙종 13년(1687년) 정묘(丁卯) 3월 13일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전임되었다.
진도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다
숙종(肅宗) 15년(1689년) 기사(己巳)년에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호하는데 반발한 송시열의 상소로 정국은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고 결국 숙종은 서인들을 버리고 다시 남인들을 중용했다. 남인이 재집권하자 남인의 명사를 함부로 죽였다고 장령(掌令) 김방걸(金邦杰) 등의 탄핵으로 삭탈되고, 그해 윤 3월 21일 양사에서 합계하여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수항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는 비답이 있어 전라남도 진도(珍島)로 유배, 곧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때 남인인 예조판서 민암(閔黯)을 비롯하여 남인들의 공격을 받고, 마침내 같은 해 4월 9일 회갑을 불과 넉 달 앞두고 진도군 배소에서 사사(賜死)되었다. 당시 향년 61세였다.
문곡은 진도로 유배가는 도중에 꿈에도 그리던 구림마을 죽림정에 들러 반가운 옛 벗들을 만나 잠시 회포를 풀었다. 문곡은 이때 심경을 시문으로 남겼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문곡은 자신이 진도에서 사사되리라곤 짐작하지 못했다. 결국 이때 남긴 글이 문곡이 영암에서 쓴 마지막 글이 되고 말았다.
10년 만에 구림 죽림정에 온 문곡
기사년(1689) 2월 25일에 구림의 현 참봉 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는데, 비에 길이 막혀 그대로 머무르게 되었다. 현 참봉네 바깥채는 죽림정이라고 부르니, 내가 예전에 기문을 지은 것이다. 월출산의 면목이 마주 보면 의연한데, 당 안에 영산홍 한 분과 동백 한 분이 바야흐로 한창 꽃을 피웠다. 영산홍은 아직 꽃이 필 때가 아닌데, 따뜻한 곳에 놓고 잘 길러서 꽃이 곱고 환한 게 아낄 만하였다. 더구나 우연히 마침 나의 유배 길을 만났으니, 마치 기약이나 있어 그러한 듯해서 또한 기이하게 여길 만하였다. 주인이 술과 밥을 마련해 위로해 주는데, 조일준과 박태초 및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단란한 모임을 이뤘다. 10년이 지난 뒤에 다시 이곳에 이르러 옛날의 벗들과 술잔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니, 참으로 서로 마주함이 꿈만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람 일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이와 같기에 내가 입으로 절구 한 편을 읊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다. 기사년(1689, 숙종15)
〔己巳二月二十五日 到鳩林玄參奉家中火 阻雨仍留 玄家外堂號爲竹林亭 余曾作記者也 月山面目 對之依然 堂中有映山紅一盆冬柏一盆方盛開 映山紅開花非其時 而就暖滋養 花艶照耀可愛 偶値吾行 若相期者然 亦可異也 主人設酒食以慰之 曹一遵朴泰初及里中諸人 皆來會作穩 十年之後 復到此地 與舊時知友 把酒譚敍 眞可謂相對如夢寐也 人事之不可料者有如此 余口占一絶 示諸人云 己巳〕
남쪽 고을과는 진실로 전생에 인연 있었을 것 깨달으니
패옥을 받아 다시 오기 15년이 되었구나
죽림정에 내리는 봄비 긴 밤에 머물러 있으니
월출산의 푸른 빛 꿈같이 의연하구나
(南鄕眞覺有前緣 受玦重來十五年
春雨竹亭留永夕 月山蒼翠夢依然)
삼연 김창흡이 부르는 사부곡, 구림
한편, 문곡의 셋째 아들 삼연 김창흡은 아버지가 사사된 후 홀로 구림마을을 방문했다. 그는 제일 먼저 회사정을 들러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비통한 심경을 토로했다. ‘구림’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는데 내용이 얼마나 슬픈지 읽는 이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한다.
구림(鳩林)
말에 내려 구림에 들어와서
먼저 회사정을 물어보네
걸친 다리에 물은 멀리 이어지고
빙 두른 대나무 사이로 바람은 서늘
마을 길에서 이곳으로 나아가 어루만지니
보고 들리는 것은 온통 슬픔뿐
늙은이는 죽어 백양이 반이고
나그네는 또 떠도는 부평초 신세
인생에서 지나온 세월 서글픈데
나는 또다시 이리저리 떠도니
다시 돌아다님은 도가 지나치고
먼 길에 이런 머무름은 없으니
밤에 묵으니 소낙비가 내리고
뜰의 나무는 아름다운 옥소리 퍼드리네
옛일 말하자니 이미 꿈만 같은데
눈앞의 모습에 어찌 정말 깨고 싶으리
호수의 정자엔 고기잡이 노래가 일고
옛날 연무 낀 모래섬은 또렷하네
도선(道詵)의 바위를 거듭 슬퍼하고
아득한 세월에 푸른 이끼는 그윽해졌네
떠나리라 내 바다로 들어가서
푸르른 월출산을 보내주리
(下馬入鳩林。先問會社亭。橫橋水逶迤。
竹圍風淸泠。里巷撫卽是。怊悵滿視聆。
耆舊半白楊。遊子又浮萍。人生悲今昨。
况我再飄零。流離復爲甚。遐路莫此停。
夜宿白雨來。庭樹散琳玲。語故已如夢。
卽事豈眞醒。湖亭起漁唱。歷歷舊烟汀。
仍悲道詵巖。歲遠綠苔冥。去矣我入海。
相送月山靑。) <출처: 삼연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