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44]
■ 구림마을(53)

군서면 서구림리 죽림정 들어가는 입구에 두 그루 팽나무가 마치 일주문 기둥처럼 우람하게 서 있다. 입구 양쪽에 심어진 대나무와 동백나무 숲을 지나 죽림정이 보인다. 
군서면 서구림리 죽림정 들어가는 입구에 두 그루 팽나무가 마치 일주문 기둥처럼 우람하게 서 있다. 입구 양쪽에 심어진 대나무와 동백나무 숲을 지나 죽림정이 보인다. 

현징의 정자 죽림정
죽림정은 군서면 서구림리 385번지에 있는 현징(玄徵 1629~1702)의 정자이다. 현징의 조부는 현건(1572~1656)이고 현진후(1606~1635)의 아들이다. 자는 사휴(士休), 본관은 연주이다. 그의 숙부 침랑공 현유휴(1598~1665)의 별업이었던 취음정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자 해체하여 이설하였다. 현징은 유배객인 문곡 김수항(1629~1689)에게 새로 지은 정자의 기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고, 문곡은 전후 사정과 취지를 고려하여 새로 지은 정자의 이름을 죽림정이라 칭하고 죽림정기를 지었다. 문곡은 죽림정 편액을 써서 양각하여 정자 문미에 걸었으며, 죽림정십영 시를 지어 정자 내부에 걸었다. 사휴 현징은 문곡이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때 큰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이는 문곡의 아들들과 현 씨 문중이 지속적인 교류를 하게 만들었다.) 

죽림정기(竹林亭記) 
현징 사휴가 작은 정자를 지어놓고 손을 맞아 영접하며 평소에 쉬는 곳으로 하면서 그 정자 이름을 나에게 물으므로 내가 묻기를 “사람의 이름과 당실의 이름은 그 뜻이 한결같지 않아 혹은 잠(箴)과 경계(戒)로 하고 혹은 흥을 붙여 지으며, 혹은 산천경물을 뜻하여 짓는 것이나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하니 사휴가 말하였다.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나는 다섯 자도 못 된 몸으로 성질 또한 게을러 편히 살며 나이 오십에 이르렀으나 더할 나위 없이 들은 바가 없었으며, 말과 행해온 일에 후회가 많으므로 가히 잠(箴)으로 깨우치기를 많이 하고자 합니다. 궁벽한 곳에서 한가하게 살면서 다행히 매여있는 고통이 없었으니, 논농사와 밭농사에 사냥하고 낚시하며 거문고 타고 술 마시며 바둑과 윷놀이 등 무릇 저의 흥을 붙일 만한 것 또한 하나가 아닙니다. 저의 집은 구림마을 옛터 가운데 있어 월출산을 보듬고 있으며 앞으로는 서호강이 흐르고 뒤로는 대나무, 유자나무, 매화나무, 석류나무를 심어 놓고 있으니 좌우에 비친 산천 경물에 따라 내가 응한 것에 접하여 받드니 가히 취하여 이름으로 삼을 수 있는 것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 가지 모두 내 정자의 이름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곧 한숨을 내어 쉬며 “내 집과 몇 리 떨어진 곳에 나의 숙부 침랑공의 별장이 있으니 원림에 있는 누대와 연못의 경치가 온 고을에서 아름답기로 이름을 날려, 가히 옛날 중국 왕유의 별장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한 정자를 그 사이에 지어 편액을 취음이라 한 것은, 즉 숙부가 즐거움을 부친 것이니 불행히 숙부가 세상을 뜬 후로 화를 입어 폐하고 유랑하여 후손들이 능히 가업을 보존하지 못하여 십수 년에 이르지 못해 옛날에 살았던 곳은 이미 빈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우뚝한 노나라 영광전처럼 정자만 홀로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장차 그 재목을 철거하여 재물로 여겨 촌민의 소유물이 되었으니 내가 저는 안타까워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 값을 치르고 여기에 옮겨지어 숙부의 옛 정취를 지키고자 합니다. 이제 그대가 제 정자에 이름을 지어주신다면, 원컨대 이것으로 뜻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내가 일어나 말하였다. “사휴의 작은아버지께 독실함이여! 청컨대 이름을 죽림정이라 함이 옳겠구나! 옛날 중국 위나라 말엽 진나라 초기에 허무를 주장하며 죽림에서 술 마시면서 청담을 하고 지내던 유영을 비롯한 일곱 선비가 있었으니 그 가운데 원적과 원함은 숙질간으로 그곳에서 두 자리를 차지했었지요. 대저 완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완함만이 홀로 그 놀이에 함께할 수 있었지요. 이제 침랑공에게 후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꽃과 돌이 어우러진 승경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도리어 사휴가 정자를 지어 전하도록 하는데 간절하였구려. 사휴의 숙부 섬김이 이와 같기에, 숙부께서 사휴를 바라보심도 완적이 완함을 대함에 뒤지지 않았음을 알겠으니, 정자를 이름 지었다고 해서 마땅히 이를 바꿀 수 없겠구려. 하물며 ‘취음’이란 뜻은 실로 장자(莊子)에서 취한 것으로, 숲속에서의 취향이 대체로 다르지 않으니, 이렇게 죽림이라고 명명하면 아마도 옛 이름에 어긋나지 않을 겁니다.”

아, 죽림의 놀이는 한 시대의 질탕함을 극진히 했다고 이를 수 있지만, 혜강과 완적이 세상을 뜨자 바람처럼 흐르고 구름처럼 흩어졌다. 그러므로 친구들과 술꾼들이 남은 터를 밟고 옛 움막을 지나면서 자취를 더듬고 감개를 일으키지 않는 적이 없었다. 황로의 탄식(죽은 벗을 그리워함)과 산양의 부(산양은 혜강의 옛집이 있던 곳으로, 친구 상수가 그곳을 지나다가 고인이 된 혜강과의 옛 추억을 그리며 지은 시) 같은 것들은 참으로 사람의 심정이 반드시 미친 바이다. 하물며 친족에게 도타운 사유의 심정으로 옛날 지팡이를 짚고 거닐며 술 마시고 시 읊조리는 걸 따르고 모시며 주선하던 곳이 이제 모두 씻은 듯 사라져 덤불과 날다람쥐의 터가 되었음에서랴. 
그러니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그리는 바가 슬프고도 안타까움을 또 어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리오. 이 때문에 남아 있는 서까래와 마룻대도 오히려 애석하게 여기고 수습해서 끝내 주인이 바뀌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정자에 편액을 할 적에 또 이름 붙일 만한 것들을 버리고 반드시 사모함을 부치도록 하였으니, 사휴의 마음 씀씀이 또한 부지런하다. 나는 참으로 이를 아름답게 여기니, 이름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 기문을 내걸어서 사휴의 뜻을 밝혀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침 곁에 있던 어떤 나그네가 내게 따졌다.
“그대의 말은 옳다고 하겠지만, 위진 시대의 선비들은 언행을 마음대로 하면서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으니, 우리 선비들이 취하지 않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사휴를 대우함이 너무 모자랍니다.”
내가 대답하였다.
“이는 그렇지 않소이다. 지금 내가 죽림칠현의 고사에서 정자의 이름을 취한 것은 완씨 숙질의 일일 뿐이외다. 경상초는 노자의 제자인데, 주자는 ‘외루’란 말을 취해 움막의 이름을 삼았으니, 또한 이 일과 무엇이 다르겠소. 게다가 그대는 산도가 완함을 칭찬했던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던가요? ‘천진무구하고 욕심이 없으니 만물도 이를 바꾸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으니, 비록 자유분방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어질기로 따진다면 오늘날 명리나 좇는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겠습니다. 이 점이 다만 취할 만한 게 아닌가요?”
 
나그네는 말없이 물러났고, 사휴가 그 말을 적어 기문으로 지어 줄 것을 청하기에 마침내 적어서 그에게 주노라.
숭정기원 후 무오년(1678) 윤삼월 그믐
(출처: 문곡집 제26권 166쪽~171쪽/흐름출판사)<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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