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43]
■ 구림마을(52)

문곡 김수항 영암적거유적지비. 구림 회사정 소나무 숲속에 문곡 김수항 유적비가 외롭게 서 있다. 문곡은 1675년 7월 영암으로 유배당하여 영암성 서문 밖에서 풍옥정을 짓고 살았다. 후에 창녕인 조경찬과 연주인 현징의 도움으로 구림마을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영암 유배생활 3년 동안 구림의 여러 선비들과 교류했으며 죽림정기(竹林亭記), 풍옥정기(風玉亭記), 안용당기, 수남사기 등의 기문을 비롯하여 죽림정십영(竹林亭十詠), 월출산 유산(遊山) 시(詩) 등 영암과 관련한 수십 편의 시를 문집에 남겼다. 문곡은 특히 안용당 조경찬을 존경했으며, 태호공 조행립을 생전에 만나보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는 태호공 묘지명을 직접 기술하기도 했다. 한편 그의 아들들 역시 영암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겨 구림마을 선비들과 꾸준히 교류를 이어갔다. 강진에 다산 정약용이 있다면, 영암에는 문곡 김수항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 문곡이 영암 구림마을에 끼친 영향은 그만큼 컸다.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29~1689)
청음 김상헌의 손자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구지(久之)이며, 시호는 문충이다. 문곡은 이율곡, 사계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받았고 시종일관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던 서인이었다. 1646년(인조24) 18세의 나이로 사마시를 거쳐 1651년 23세로 알성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672년(현종13)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발탁되어 대제학을 겸임하였고, 1674년 영의정이었던 형 김수홍 대신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기년(朞年)으로 정하자고 주장했던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西人)들이 1674년 허목(許穆), 윤휴(尹鑴) 등 남인(南人)들의 집권으로 대거 축출당하는 과정에서 문곡 김수항은 이듬해 1675년 7월에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영암 유배생활은 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때 연주인 사휴 현징(玄徵)(1629~1702)이 문곡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는 현씨 가문이 문곡의 아들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지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데 반발한 송시열의 상소로 정국이 혼란한 와중(기사환국)에 남인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 진도로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사망 당시 향년 61세였다.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4언구와 6언구를 기본으로 하여 대구만으로 문장을 구성한 한문문체. 사륙문이라고도 한다.)에서는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또한 서예에도 능하여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했고, 전서와 해서·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저서로는 ‘문곡집’과 ‘송강행장(松江行狀)’ 등이 있다. 

문곡의 여섯 아들, 육창(六昌)
김수항의 여섯 아들을 일러 육창(六昌)이라 부른다. 이름 가운데 모두 창(昌)자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즙(金昌緝), 김창립(金昌立)이 이들인데, 정치ㆍ철학ㆍ문학ㆍ예술 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특히 김창협과 김창흡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문곡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만나러 영암 죽림정에 들러 시문을 남겼다. 형제 육창(六昌)이 일세에 이름을 날림으로써 그의 가문은 조선 후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낭주의 절구 여덟 수를 떠올리다가 구림의 여러 분에게 부치다〔憶朗州八絶 寄鳩林諸君〕
물은 주룡 나루에서 합쳐지고 / 水合住龍渡
산은 가학령에서 나뉘는데 / 山分駕鶴嶺
이 가운데 별세계가 있으니 / 就中有別區
서호가 만 이랑의 물결로 열렸어라 / 西湖開萬頃
둘째 수〔其二〕
관란정에는 죽도의 가을 / 觀瀾竹島秋
요월정에는 구림의 저녁 / 邀月鳩林夕
아름다워라 국사암이여 / 應憐國師巖
시인의 자취 남았으리라 / 留著騷人跡
관란과 요월은 모두 정자 이름이고, 국사암은 구림에 있다.
(觀瀾,邀月皆亭名。國師巖在鳩林)
셋째 수〔其三〕
어느 곳이 가장 그리운가 / 何處最相思
유배지의 꽃다운 두약이라 / 江潭芳杜若
멀리서도 알겠으니 노 젓는 어부 / 遙知鼓枻人
귀양객 아직도 기억하리란 걸 / 尙記行吟客
넷째 수〔其四〕
안용당 노인 / 安用堂中老
평생 의리가 하늘에 닿으셨더니 / 平生義薄雲
우뚝하던 호해의 기상 / 居然湖海氣
도리어 광릉 무덤에 묻히셨구려 / 埋却廣陵墳
다섯째 수〔其五〕
도갑사의 아름다운 경치 / 招提道岬勝
바위 폭포와 북지가 그윽했지 / 巖瀑北池幽
가장 생각나니 수남사 / 最憶水南寺
산취루에서 시 지었지 / 題詩山翠樓
여섯째 수〔其六〕
구정봉 앞길에서 / 九井峯前路
대나무 수레로 눈을 밟고 갔었지 / 筠輿踏雪行
고산에 다시 가기 어렵지만 / 孤山難再到
맑은 경쇠 소리 꿈속에도 들린다오 / 淸磬夢中聲
일곱째 수〔其七〕
귤나무 서리 오기 전 열매에 맺고 / 橘樹霜前實
매화가지 눈 속에서 꽃이 피지 / 梅梢雪裏花
맑은 향 응당 변치 않으리니 / 淸香應不改
누가 다시 하늘가에 부쳐 줄까 / 誰復寄天涯
여덟째 수〔其八〕
옥 같은 생선회는 송강의 별미 / 玉鱠松江味
실 같은 순채는 천리 밖의 국 / 絲蓴千里羹
그렇지만 북쪽 국수 새참으로 먹자니 / 雖然餐北麪
오히려 저절로 남쪽 음식 생각나네 / 猶自憶南烹
<출처: 문곡집 제5권 214쪽 ~ 217쪽/흐름출판사>

문곡 낭주 절구 여덟 수 해설
죽도는 영암 서호의 가운데에 있는 섬 이름이다. 대죽도와 소죽도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는데 당대 풍류객들의 최고 유람 장소였다. 죽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죽도에 있던 정자 이름이 ‘관란정’임을 기록한 이는 지금까지 문곡 김수항이 유일하다. 
요월정은 1540년 동호리와 양장리 원머리 사이에 진남제 제방을 쌓아 모정마을 앞 간척지를 조성했던 월당 임구령의 사랑채인 요월당을 가리킨다. 도선국사 탄생설화를 지닌 국사암 곁에 요월당이 있었다. 19세기 초에 선산 임씨들이 구림을 떠나 이사하는 바람에 요월당은 없어졌고, 현재 그 자리에는 낭주 최씨 문각인 덕성당이 세워져 있다.
안용당은 창녕인 조경창의 집 당호이다. 문곡 김수항은 조경창을 존경했으며 안용당기를 썼다. 문곡은 또한 도갑사의 남암에 들러 그곳을 답사한 후 석민 스님의 부탁을 받고 남암의 이름을 수남사로 개명하고 수남사 기문을 지었다. 수남사기 안에 ‘산취루’라는 누정 이름이 나온다.
‘문곡집’ 권26 ‘수남사기(水南寺記)’에 “그 절은 오래도록 이름이 없이 도갑사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암(南菴)이라고 불렸는데, 내가 수남사라고 이름을 고치고 그 누각을 산취루(山翠樓)라고 이름 지었다.”라고 하였다.
문곡이 영암에 유배된 후에 쓴 낭주 절구 여덟 수는 그 당시 월출산과 서호, 구림의 풍경과 지형을 자세히 묘사해 놓고 있어서 당시의 주변 모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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