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36]
■ 구림마을(45)
정유재란 때 막대한 피해를 입다
구암 임호가 회사정(1565년)과 대동계 설립을 통하여 구림마을 주민들의 친목과 화합을 다지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구림 사회의 번영과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해는 임호가 사망한 연도이기도 하다. 1597년 재발한 정유재란으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함에 따라 그동안 잘 버티던 전라도가 왜적들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말았다. 영암 구림마을도 이 전란을 피해 가지 못했다. 수많은 집과 정자가 불에 탔다. 임호가 지은 회사정 역시 이때 병화에 휩싸여 전소되고 말았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기문이 남아 있다. 태호공 조행립은 1640년에 다시 회사정을 중건했는데 분서(汾西) 박미(朴瀰)(1592~1645)가 쓴 회사정기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도선국사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여럿 등장한다.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던 조선시대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도선국사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으며 존경과 찬탄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박미의 회사정 기문
「지금의 예(禮)는 사(社)보다 더 오래된 것이 없으니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봄에 구하고 가을에 보답하는 전례가 갖추어져 있다. 이것이 확장되어 왕사, 후사, 치사가 되었는가 하면, 내려가 확대하고 또 확대되어 외딴 고장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사가 없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분유가 그것이고 잡기나 소기 등이 스승에 의해 사를 일컫는 것이 있으니. 예를 들면 백련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기타의 모임이나 술 모임 같은 것들도 으레 이 사(社)의 칭호를 붙여놓고 구약을 거듭 다짐할 적에는 향약을 모방하고 연회를 열 때는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모방하였다. 요컨대, 고장이나 마을의 노소들이 약조를 할 경우에는 향약을 본보기로 삼고 술을 마실 경우에는 향음주례를 본보기로 삼았으니. 이 또한 옛날의 도를 실행한 것과 같다. 어찌 다른 것보다 조금 낫는데 그칠 뿐이겠는가? 다만, 촌락의 대소에 따라 인구의 다과가 있고 풍속의 후박에 따라 예절의 성쇠가 있음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전라도 영암군 구림촌은 물산이 풍부하기로 특별히 알려져 있다. <여지>를 상고해 보면 “당나라 중엽에 구림촌의 최씨 처녀가 정원에 큰 오이를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먹고 난 다음에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인도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대숲에다 버렸더니 비둘기와 수리가 날개로 덮어서 보호하므로 마침내 데려다 길렀는데 그가 중이 되어 이름을 도선이라고 하였으며, 당나라에 들어가서 중 일행에게 비술을 배워 돌아왔다”고 하였다. 또 광양현지를 상고해보면 최유청이 저술한 도선비문이 실려 있는데 비문에 “도선이 광양현의 옥룡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속성은 김씨이고 신라 영암사람이다. 혹은 신라 태종의 후예라고도 하나 사서에 그 세계가 기록이 되지 않았으며 그의 어머니 강씨가 명주를 삼키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불도를 깨달은 과정을 두루 서술할 때 누락한 실수가 없었을 터인데, 그의 어머니 성씨가 다른데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간 일이 기재되지 않았다. 최유청은 알려진 사람인데다 세대도 매우 멀지 않으므로 고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의 민간 전설에도 도선의 어머니 성은 최씨이고 처음 태어났을 때 영리하였으며, 오이를 먹고 <태어나 버렸더니> 비둘기가 날개로 덮어주었다고 말하였으니, 도선이 중국에 들어간 것과 영암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리고 구림마을이 이로 말미암아 득명하였으며, 세속에서 이른바 국사암, 아시천이란 것 또한 불가사의로 부칠 수밖에 없다.
비록, 마을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인구가 중다하고 물산이 풍요하여 천하의 큰 고을인 낙양 곡역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상하 수백 년간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그 마을 사람들도 군읍으로 자처하여 타촌 사람들 호칭할 적에 반드시 “촌사람이 무엇을 알겠는가?”하고 하였으니, 옛날 어느 때부터 번창한 것인가? 아니 도선이 방향을 잡은 마을이 형세가 지리의 법에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 번창한 군읍으로 자처했더라도 예로 절제하지 않을 경우에는 금수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니 재앙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이다.
향선생 구암 임공(임호)이 이러한 점을 두려워한 나머지 맨 먼저 회사를 창도하자, 선비들이 한결같이 호응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마음이 좁은 사람들까지도 너나없이 추종하여 그림자가 따르듯 돌을 물에 던지듯이 의론이 일치되었다. 이에 정자 지을 알맞을 터를 고른 끝에 광술(廣術)의 곁에 조그마한 땅을 얻어 세 칸의 집을 건립한 다음 회사정이란 편액을 붙였는데, 땅 3분의 2를 떼어 제사 지내는 터로 삼았다. 귀신에게 푸닥거릴 하지 않기 때문에 제단을 쌓지 않은 것이고, 집을 짓고 땅을 떼어 놓은 것은 상하의 구별을 둔 것이다. 이에 봄가을로 사람들이 모여 연회를 열면서 온 마을이 같이 즐기니 옛날에 이 마을에 대해 “부유하게 살면서 가르친 바가 없다.”고 지적한 사람들은 그 입이 저절로 벌어졌고 또한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부러워하는 자들도 많았다.
우리 조모 임씨의 고향이었기에 내가 어려서부터 익히 듣고 선망한 나머지 한번 그곳을 가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 뒤에 내가 가문의 환난으로 인하여 그곳에 갔더니 정자가 초가로 바뀌어 옛날 규모의 절반도 채 안 되었는데 정유년(1597)에 불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림촌의 번창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고 정자는 복구되지 않았지만 조그마한 초가를 건립하여 곡삭(告朔)의 양(羊)처럼 남아 있었다(하략)
계미년(1643년 인조21년) 정월 15일
분서거사 박미 중연은 성남의 누사에서 쓰다.」
<출처: 태호집(조행립 문집) 730쪽 ~ 742쪽/ 태호선생기념사업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