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30]
■ 구림마을(39)
회사정기를 쓴 임호는 구림 대동계 창설 취지와 내용을 담은 ‘구림동 중수계 서’(鳩林洞中修契序)를 남겼다. 당시 동장(洞長)은 박규정이었는데 그는 오한공 박성건의 손자다. 다음은 임호가 구림동계를 중수하며 쓴 서문의 전문이다.
구림동 중수계 서(鳩林洞中修契序)
구림은 역사가 오래된 동리이다. 신라말부터 동리 이름을 구림이라 하였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7~8백년 동안 흥폐(興廢)와 성쇠에 기복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실은 잠시 제쳐두고 전해 듣거나 직접 본 것을 말하건대, 외선조 박빈(朴彬)이 처음으로 이곳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셨다. 산천의 영기가 인걸을 내는 것인데, 소격서령 박성건, 진원현감 박지번, 천안현감 박지창이 선조께서 개창하신 업을 이어받아 애쓰셨다. 또한 정언 박권, 첨지 박조 및 나의 선친이신 판서공 임구령에 이르러 더욱 이름을 날렸고, 나의 아우 임혼이 마을을 더욱 윤택하게 가꾸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는 사이 150년 동안 물산은 풍부해지고 인구도 번성하여 1~2천 호의 마을로 번창하였으니 오래된 마을이자 인구가 많은 마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살펴 보건데, 안으로는 국도(國都)로부터 밖으로는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하급 관료들 사이에서 계를 만들어 기쁜 일이 있으면 축하하고 근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위로하고 있다.
우리 마을처럼 오래된 마을이고 물산이 풍부하며 인구가 많은 곳인데도 유독 계를 조직하지 않아 경조를 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일까? 나로서는 매우 이상스럽게 생각해 오다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무릇, 사람의 정이란 친하고 소원함으로 나뉘고 멀고 가까움으로 간격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친하고 가까우면 아무리 소원하게 지내고자 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대신 소원한 처지에서는 친하고 가까이 지내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선대에 의리란 기가 한 몸으로 연결되는 것이요, 그 분수란 왼손에 꺼내서 오른손에 들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은 저절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요, 슬픔은 몹시 애달파하여 나타나는 것이어서 마음의 심부름꾼이요, 수족이 달리 몸뚱이와 같은 것이다. 기쁜 일에 경축하고 슬픈 일에 위로해주었으므로 권장할 필요가 없어 계를 조직하지 않아도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나가고 말세에 들어서면서 유복지친(有服之親)(상복을 입는 가까운 친척)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면서 친함도 다 없어지고, 친함이 없어지면 사람의 정 역시 그러할 것이다. 정이 다해 버리면 사랑을 가르쳐도 사랑이 생기지 않고 슬픔을 가르쳐도 슬픔이 나오지 않아 서로를 길가는 사람 보듯 할 것이다. 길가는 사람 보듯 하게 되면 기쁜 일에 누가 경축해 줄 것이며 근심스러운 일에 누가 위로해줄 것인가. 오호라! 길가는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진다면 우리들은 어찌할 것인가. 당초에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왔는데 길가는 사람처럼 앉아서 쳐다보기만 하고 구제할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기쁜 일에 서로 축하하고 근심할 일에 위로하며 서로를 잊지 않도록 해주는 일은 계를 조직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
옛날에는 이러한 이유로 계를 만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동장 박규정께서는 세대가 내려가고 인심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오래전부터 걱정하여 계를 조직하자는 의논을 발의하고 축하하며 위문하는 일을 무궁토록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필자인 임호와 이광필, 박성정, 유발, 박대기, 그리고 아우 임완 등은 이에 호응하여 ‘옛날의 문왕과 무왕은 삼물(三物)로 백성을 가르쳤고 송나라는 여씨향약으로 나라의 정치를 돕고 인심을 교화하였으니 이것이 하나의 본보기다. 더욱 근세에는 위로는 문왕과 무왕 같은 어진 임금이 있고 아래로는 정승들이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려 풍속을 순화하고 있는데 어찌 사랑과 슬픔을 밖에서 구하겠는가’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하니 우리가 계를 조직하는 일은 임금과 정승들이 바라는 화민성속(化民成俗)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박규정 어른의 말씀에 의해서 계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일선 남호처사 임호 근서
<출처-남호처사구암공유고 156p~157p><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