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29]
■ 구림마을(38)

남도 8대 정자 회사정의 가을 풍경. 꽃무릇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1560년대에 임구령의 장남인 구암 임호가 창건했으나 정유재란 때 방화로 소실되어 1640년에 태호공 조행립이 중창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1986년에 중건했다.

임구령의 장남 남호처사 임호
월당 임구령은 처가 동네인 구림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호정 국사암 앞에 요월당을, 모정리 연못가에 쌍취정을 각각 지어 거처를 마련하고, 양장 원머리와 동호리를 잇는 진남제를 구축하여 천 두락에 이르는 간척지를 조성하였다. 이것은 당시 영암 사회에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는데 선산 임씨가 경제적 기반을 확보함과 동시에 구림을 중심으로 한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이었다. 임구령은 슬하에 임호, 임혼(林渾), 임완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이 중에서 차녀를 해주인 최경창에게 출가시켰다. 임혼은 1553년(명종8) 계축별시에 과거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역임한 인재였으나 안타깝게도 37세의 이른 나이로 타계하였다.
월당의 장남인 임호는 자가 호연이고 호는 구암이다. 1522년(중종 17년)에 출생하여 중부인 석천 임억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명종 기유년(1549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6년(명종 11년)에 사축서별제를 제수받았다. 7년 후인 1562년에 사옹원직장으로 승진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부친상을 당하여 삼 년 시묘살이를 마쳤다. 그 후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구림에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향촌 사회의 규약을 정하여 풍속을 교화하는 데 힘쓰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7월에 향년 71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임호가 쓴 회사정기(會社亭記)
한편, 임호는 명종 대(1546~1567)에 회사정을 건립하는 데 앞장섰으며 당시의 동장 박규정과 함께 명종 20년(1565) 대동계를 발족하였다. 이 구림 대동계는 전북 태인의 고현동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역사가 오래된 향약계라고 한다. 
회사정은 대동계의 여름 수계 장소와 외부에서 구림을 방문한 손님들의 영접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을 모으고 화합하게 하는 구심점이었다. 오늘날 구림이 자랑하는 회사정과 대동계를 설계하고 창설한 주역이 바로 임호였으니 그의 역할이 얼마나 컸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임호는 회사정기와 구림대동계서를 직접 기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다음은 그가 쓴 회사정기 전문이다. 이 글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고향을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다.

회사정기(會社亭記)
내가 듣기에, 무릇 사람이 사는데는 반드시 토지가 필요하고, 토지가 있으면 반드시 사(社)(단체)가 있으며, 사(社)가 있으면 반드시 신(神)이 있어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이래서 옛날에는 위로는 서울에서부터 아래로는 주현촌리(州縣村里)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社)가 있었으며, 봄·가을 사(社)의 제사 때에는 혹은 풍년 되기를 빌고 또는 감사의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여러 전기에 뚜렷이 나와 있다. 중세 이후로 서울과 주·현 이외 지역에서는 이 법이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심지어 서로 담론하고 수목(修睦)하는 곳도 전무한 실정이다. 
근자에 여러 사람들이 건의하여 마을 중간지점을 택하여 정자를 짓고 회사정(會社亭)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모든 동사인(同社人)은 춘추의 사제(社祭) 때 사(社)의 일을 같이 의논하고, 풍년을 빌고 감사제를 올리며, 옛날 제도를 되살림으로써 성인들의 예를 사랑하는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이 정자를 세운 뜻이다. 
이로부터 사인(社人)은 봄·가을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여름은 시원하게, 겨울은 따뜻하게 이곳에서 매일 만날 것이며, 누었다 일어났다 하여 편히 쉬며, 혹은 노래하고 휘파람 불며, 웃고 이야기하며 쉴 수 있을 것이다. 복날이나 섣달 그믐날에는 닭·돼지를 잡고 대추 놓고 술독을 열어, 성현들이 잔을 주고받으며 서로 기뻐하고, 취한 후 열이 올라 화기 충천하고 스스로 읊으며 노래소리 요란하니, 그것이 이 정자의 흥취인 것이다. 
만약 죽거나 이사하여 사(社)에 나가지 않는다면, 출입(出入)에 있어서 벗이라고 할 수 있는가. 수망(守望)(도둑을 경비함)에 있어서 협조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질병이 있을 때 상부상조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친목의 길을 저버리면 성현의 가르침에 따르지 아니한 것이 된다. 내가 지금 깊이 생각할 때 우리 마을에 있어서는 장래가 유망하니, 여러분은 또한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이다. 끝으로 시(詩) 한 수가 떠오르니,

논밭 갈고 우물 파니
군주 은혜 매일매일 무거웁고 윤택하네.
마을마다 태평송가 노래하는 세상일세 
오순도순 사이좋게 그 속에서 한가하네.

<남호처사(南湖處士) 임호(林湖) 기술함.><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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