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과 구림 - 8

 왕인박사유적지 전경 1985년 8월 구림마을에 왕인박사유적지 정화사업이 착공되어 1987년 9월 26일 준공됐다.
 왕인박사유적지 전경 1985년 8월 구림마을에 왕인박사유적지 정화사업이 착공되어 1987년 9월 26일 준공됐다.

영암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를 받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김창수 옹은 서둘러 영암 구림마을을 찾아온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관련 내용이다. 책에 나온 원문을 그대로 전재한다.

구림마을을 찾아

여기에 두 차례(1972년 11월과 73년 3월)에 걸쳐 2주간 동안 현지를 답사한 기록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73년 3월 14일에 희망을 가득 안고 경쾌한 기분으로 서울역에서 목포행 태극호에 올라 곡창 김제 만경평야를 건너 영산포까지 달리고 나니 꼭 6시간, 이곳이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과의 해상교통이 편리해서 피차간 왕래가 빈번하던 곳이다. 여기서 다시 서남쪽을 향해 버스와 택시로 32㎞쯤 달리면 영암군청을 경유, 이윽고 중첩한 연산(連山)이 병풍과도 같이 둘러서면서 앞길을 막는다. 여기가 바로 이름도 드높은 월출산 아래의 구림(鳩林)이라는 마을이다.
(박사왕인 201p/김창수/1975)

촌로와의 대화

당초에 영암 「왕인탄생지」를 알려주었던 강신원 씨(JCI청년회의소 영암군회장)의 안내로 영암군청 소재지에서 서남방으로 8㎞ 떨어진 곳에 월출산 하(下)의 구림리 앞 삼거리에 도착하여 옥호(屋號)를 「보림다방」이라고 하는 자그마한 다방에 들렀다.

영산포에서부터 동행해온 이백래 씨(왕인 문제에 관심이 큰 동신인초 사장)와 잠깐 쉬고 있는 사이에 이 마을의 유지로 보이는 연로한 분들(최일석, 박석암, 최영암 외 2인)과의 대화 중 탄생지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 이 고장에서 왕인이라는 큰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 고장을 버리고 일본에 건너간채 다시 돌아오지를 않았으니 어찌 애향(愛鄕)하는 애국자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부 인사들은 왕인을 「일본귀화인」으로 인식 착오마저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백제 현인 왕인의 위업>(중앙일보 연재의 졸고, 72년 8월 ~ 10월)을 보고서 박사왕인이 정말로 큰 인물임을 알고 매우 놀라기도 하고 감명이 깊었다고 털어놓으면서 「박사의 탄생지가 바로 이 마을 구림(성기골)인데 도선국사의 태생지이기도 하다」고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왕인에 대한 전설과 유적이 풍부하다는 것을 대강 들었다.

이 무렵에 JCI 청년회의소회장 강신원 씨와 동 상임부회장 최주일 씨 그리고 이들이 소개한 박찬우 씨가 함께 들어왔다. 박 씨는 영암 라이온스 이사 및 산악회 등의 간사직을 맡고 있는 활동가였다.

박 씨의 말에 따르면 「왕인 탄생지」 문제는 『해방 전인 1937년에 일본학자(명단이 없음)들이 와서 자세히 조사하고 갔을 뿐 그 뒤에 「국내에서는 필자가 처음」인데 그 동안에 중앙일보 연재인 「백제현인 왕인의 위업」을 뜻있게 읽었다』고 하면서 이제 필자를 직접 만나니 기쁘다는 인사말을 잊지 않았다.”
(박사왕인 209p~212p/김창수/1975)

김창수 옹은 주민들과의 대화를 마친 후 주민들의 안내로 성기동 구유바위(조암 – 최씨 처녀가 빨래했던 곳), 최씨원(도선국사 탄생지), 문산재(문수암 터), 문수암 미륵불상, 자연동굴, 구림마을 상대포, 도요지 등을 답사한 후 돌아갔다. 김 옹은 곧이어 성기동 최씨원을 왕인박사 탄생지로, 1684년에 완공된 문산재를 왕인박사가 공부했던 수학처로 공표했다. 어떠한 문헌자료도, 확인된 유물도 없는 상태에서 왜 그렇게 성급하게 공표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오키의 ‘왕인박사 동상 세우기’ 운동

여기서 눈여겨볼 사항이 하나 있다. 강신원 씨, 박찬우 씨를 비롯한 영암인들이 구림 성기동이 왕인 탄생지라고 전해 들은 정보의 근원지는 바로, 일제 강점기 때의 ‘일본인’들이라는 것이다. 박찬우 씨의 말에 의하면 정확히 ‘1937년 일본학자들이 와서 자세히 조사하고 간’ 후로 갑자기 구림마을에 ‘왕인’이라는 이름이 떠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영산포 정치 승려 아오키가 일제의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에 일조하기 위하여 구림마을에 ‘왕인박사 동상 세우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던 때가 바로 1937년이었다. 이를 위해 소위 일본학자들(필자가 보기엔 사기꾼들)이란 사람들을 구림마을로 보내 조사하는 시늉을 한 것이었다. 구림마을 주민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도선국사와 관련한 설화와 유적에 대해서 기록한 후 그것을 왕인박사와 관련한 이야기로 둔갑, 조작하여 그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일부 마을 주민들은 그것을 보고 구림 역사상 최초로 왕인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던 것이고, 해방 후에 잊혀졌다가 김창수 옹이 중앙일보에 연재한 기사를 보고 그때 일을 떠올려 김 옹에게 제보를 한 것이었다.

1973년 10월 3일 김창수 옹은 이선근, 유홍열, 조동필 박사 세 분과 유달영, 유승국 교수를 안내하여 구림마을 성기동을 함께 답사하였다. 그들은 현지의 전설과 설화(사실은 도선국사 전설과 탄생설화)를 듣고 ‘왕인박사 탄생지는 구림마을이다’라는 섣부르고도 황당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다음 날인 10월 4일 전남일보·전남매일 지방신문에 이어 동아, 조선, 경향 등 중앙지에 대서특필로 보도되고 각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서도 연일 보도되었다. 

왕인박사유적지 조성과정

「호남명촌 구림」(구림지편찬위원회/2006)을 살펴보면, 그 후의 왕인박사유적지 조성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1973. 10. 3 김창수, 이선근, 유홍열, 조동필, 유달영, 유승국 교수 등 구림 유적지 답사
1973. 10. 25 사단법인 왕인박사현창협회 창립(회장 이선근, 이사장 김신근)
1974. 5. 18 왕인박사현창협회, 광주YWCA 강당에서 ‘왕인박사유적 종합고증’ 발표
1974. 7. 5 일본 왕인박사현창협회 무도화인 등 일해 구림 현지 답사
1974. 10. 11 ~ 11. 10 왕인박사현창협회 답사단 현지 답사(조사단 유승국, 김영원, 박찬우, 이은창, 이정업, 임해림, 임영배)
1974. 12. 30 왕인박사현창협회 ‘왕인박사 유적 종합보고서’ 전남도에 제출
1975 허련 전남지사 2억6천만 원 지원, 구림 일대와 도갑사 주변 정화사업으로 왕인박사 성역화사업 착수
1975. 8. 20 전남교육위원회, 월출산 산장호텔에서 ‘왕인박사유적 학술세미나’ 개최
1975, 8. 25 일본영사관 월출산 산장호텔에서 ‘왕인박사유적 학술발표회’ 개최
1976. 9. 18 전남도문화재위원회 ‘왕인박사유적지’ 도 문화재 기념물 제20호 지정
1976. 11. 11 왕인박사 유허비 건립
1985. 8. 16 왕인박사유적지 정화사업 착공
1985. 9. 6 왕인박사현창협회 부설 왕인박사연구소 발족, 소장 이을호(당시 국립 광주박물관 관장)
1987. 9. 26 왕인박사유적지 준공
(출처: 호남명촌 구림, 111p~112p)

이로써 대동계를 필두로 협동과 의기의 선비정신으로 이름난 호남명촌 구림마을은 전혀 예상치 못한 행로를 밟게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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