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과 왕인 -5

일본 오사카 부 히라카타 시에 있는 전왕인묘 전경 -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전왕인묘 명칭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전伝’일 뿐이며, 학문적으로 보증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는 주석을 달아 놓고 있다. 
일본 오사카 부 히라카타 시에 있는 전왕인묘 전경 -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전왕인묘 명칭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전伝’일 뿐이며, 학문적으로 보증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는 주석을 달아 놓고 있다. 

일본 에도시대에 등장한 왕인

1,700여년 전 사람인 왕인이 언제부터 일본에서 조명을 받게 되었을까? 진짜 왕인묘는 존재하는 것일까? 갑작스런 왕인묘 스토리는 일본에서 유교가 제일 번성하던 에도시대에 꾸며졌다. 불과 300여 년 전 일이다. 에도시대 중기인 1,731년, ‘나미카와 세이쇼’라는 쿄토의 유학자가 지리서를 편찬하기 위해 오사카의 ‘후지사카’ 마을을 방문했다가 유래를 알 수 없는 자연석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왕인의 묘’라고 단정하고 자연석 옆에다 ‘박사 왕인의 묘’라고 쓴 나무 기둥을 세웠다. 이른바 ‘왕인묘 스토리 텔링’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오사카 왕인묘

재일사학자 김영달은 이것에 대해 “일개 학자의 소망, 즉흥적인 착상, 공명심에 의한 역사의 날조로서 막부의 권위를 내세운 강압적인 비의 건립이다.”라고 결론지으며 <위사조선/통신181호, 2000>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왕인묘 날조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1731년, 쿄토의 유학자 ‘나미카와 세이쇼’가 지리서를 편찬하기 위해서 명소와 유적을 탐방하던 중 ‘킨야’의 ‘와다사’라는 저에서 ‘왕인분묘내조기’라는 고기록을 보았고, 그곳을 답사하여 ‘후지사카’ 마을의 ‘오니총(才二塚)’이라는 자연석을 보게 되었는데, 이렇다 할 근거도 없는 이곳을 ’왕인의 묘‘라고 단정하여, 그 지역의 영주에게 진언하여 ‘박사왕인지묘’라고 새긴 묘석을 세웠다.

‘나미카와 세이쇼’의 지지편찬 조사사업은 막부(막부는 당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일본을 통치한 무인 정권으로 천황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의 명에 의한 것으로 고서 탐색과 비의 건립에 대하여 상부관청의 증서를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그는 막부의 권위를 배경으로 필드워크를 해온 것이다.

따라서 지방의 영주라고 해도 그의 진언을 거스를 수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일개 학자의 소망, 즉흥적인 착상, 공명심에 의하여 저질러진 역사의 날조로서 막부의 권위를 내세운 강압적(억지)인 비의 건립인 것이다. 더구나 ‘왕인분모내조기’라는 것도 그 주변에 많이 있는 왕인 전승의 하나일 뿐이다.”

‘傳 왕인묘’

오사카 히라카타 시에 있는 왕인의 무덤은 그냥 ‘왕인묘’라고 하지 않고 ‘傳왕인묘’라고 소개되고 있다. 말 그대로 ‘왕인의 묘라고 전해진다’는 뜻이다. 그 속에는 진짜가 아니라는 뉘앙스가 진하게 풍긴다. 일본어 위키피디아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고 있다.

“전왕인묘 명칭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伝’일 뿐이며, 학문적으로 보증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하기 바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일본인 스스로도 진짜 왕인묘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구림마을 왕인 탄생설을 신봉하지 않는다. 어떠한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학계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영암군에서 설명하는 전왕인묘는 어떤 내용일까? 여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 그대로 싣는다.

디지털영암문화대전에 나타난 기록

[개설] 1,600여 년 전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들고 가 문자를 전하여, 일본 문화의 시조로 숭앙받는 백제 사람 왕인의 묘소이다. 왕인총은 1938년 오사카 부[大阪府]가 사적으로 지정한 히라카타 시[枚方市]의 전왕인묘(傳王仁墓)이다. [위치] 왕인 박사 무덤은 일본 오사카 부 히라카타 시 후지사카 마을에 있다. 일본 현지 주소는 ‘日本 大阪府 枚方市 藤阪東町 2丁目’이다. [변천] 일본에서는 와니[ワニ-]라고 부르며 일본 고대의 『고사기(古事記)』나 『일본 서기(日本書紀)』에도 기록되어 있다.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1731년에 코토[京都]에 사는 유학자 나미카와 세이쇼[竝川誠所]가 도쿄 근처 사찰에서 『왕인 분묘 래조기(王仁墳廟來朝記)』라는 문서를 보았다. 거기에는 ‘왕인은 가와치[河內]의 후지사카[藤坂] 마을에 있는 묘에 묻혔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글을 읽은 나미카와는 1732년 후지사카 마을에 직접 가서 유래를 알 수 없는 둥근 자연석을 발견하고 왕인의 묘라고 생각하였다. 나미카와는 옆에 ‘박사 왕인의 묘’라고 쓴 나무 기둥을 세웠다. 이는 왕인 박사 무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태] 왕인 박사 무덤의 규모는 너비 약 90㎝, 높이 약 80㎝, 두께 약 30㎝이고, 원형의 자연석으로 이루어졌다. [현황] ‘박사 왕인의 묘’라고 새겨진 자연석은 한일 간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1938년 사적(史蹟)으로 지정되고,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1984년 11월 3일 제1회 ‘왕인박사 축제’가 열리고 무궁화 동산이 조성되었으며, 1985년 ‘왕인박사 묘를 지키는 회(王仁塚の環境を守る會)’가 발족되고 1988년에 사적 지정 5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묘역 환경 정화 사업을 하였다. 한편 전라남도 영암군 왕인박사 성기동 유적지 내에도 일본의 것을 모방하여 왕인의 가묘가 조성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왕인의 묘는 왕인의 묘라고 추정할 만한 사료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으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1732년 발견된 자연석 돌에 대한 고고학자의 견해는 이러하였다. “4~5세기에 만들어진 분묘 위에 돌을 얹는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나미카와가 발견한 돌은 불교가 전해진 후 수백 년이 지나서 묘제가 바뀐 중세의 것이다.”라는 것이다. 또 전왕인의 묘를 1938년 사적 지정한 것 또한 일본 정부의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하다. 이른바 식민 통치의 기간 중에 일본은 왕인이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실을 적극 홍보하였는데,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곧,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뿌리가 같다’는 논리의 전거로 왕인의 묘를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 왕인묘는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출발되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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