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동네 '花들짝'… 남도 고즈넉한 멋 간직

한바탕 꽃 잔치가 벌어졌던 앞동산, 뒷동산에는 꽃이 진 그 자리에 어쩌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연둣빛 새싹이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다. 연초록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남도의 산과 들은 하루가 다르게 신록이 우거지고 있다. 나는 신록이 짙어 가는 이 풍경을 가을의 울긋불긋한 단풍과 비교하여 ‘봄 단풍’이라고 부른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서, 새싹이 돋는 순서에 따라서, 응달과 양달에 따라서, 이 ‘봄 단풍’의 색도(色度)는 각양각색으로 달라진다. 점점 짙은 초록색으로 번지는 신록 위에 맑은 햇살이 내리쬐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집밖으로 나가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다.
관해정(觀海亭) 이야기

“이 정자의 원래 이름은 관회정(觀悔亭)이다. 240년 전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여경 박필각이라는 분이 ‘벼슬을 한 것이 후회스럽다’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이 분이 한양에서 이곳(115번지) 새터에 정착한 다음 지은 것인데, 그 사연이 참 흥미롭다. 때는 조선 21대 영조대왕 시절이었다. 영조 31년인 1755년에 나주에서 괴문서 사건이 발생했다. 영조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사도세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노론파는 영조를 추종하는 세력이었고, 소론파는 사도세자를 따르는 신진세력이었다. 노론파는 이 괴문서 사건을 빌미로 소론파를 숙청하였다. 이때 여경공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노론의 음모에 희생되어 1761년 나주 남평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일가 되는 사헌부 대사헌 박도원과 영조의 5번째 사위인 박명원이 박필각의 무죄를 거듭 간언하여 8개월 만에 복직되었다. 이 때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있었고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여경공은 이런 임금을 섬기면서 관직에 연연한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고 관직을 사퇴하고 유랑하다 진암마을(지남마을)에 정착했다. 그 해가 1762년이고 관회정(觀悔亭)은 이듬해인 1763년에 지었다. 그 후 노후되어 유실되었는데 1860년 증손자인 박종식이 복원하였으나 일제시대의 풍랑을 겪으면서 후손들이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훼손되어 쓰러져버렸다. 1950년대 초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힘을 합하여 유선각을 지으면서 관해정(觀海亭)이라 이름지었다. 그런데 이 유선각도 사라태풍 때 쓰러지고 말았다. 지금의 콘크리트 유선각은 안진호라는 분이 이장을 할 당시 마을 돈 90만원을 들여 지은 것이다”

관해정에서 들녘 너머로 마주 보이는 모정마을에는 주변의 뛰어난 풍광을 읊은 12개의 시구를 각 기둥의 주련으로 하는 원풍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마을 호수가 둔덕에 자리 잡은 이 정자에서 굽어보면 지남들녘 온전하게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원풍정 12경’에 ‘지남야우(指南夜雨)’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온 들이 짙은 초록으로 물들은 어느 여름날 밤, 한 차례 장대처럼 굵은 소낙비가 내리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사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가슴이 답답한 사람들은 한 번쯤 원풍정에 와서 수평선이 보일 만큼 확 트인 너른 지남들녘을 내려다볼 필요가 있다. 소낙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 저녁이라면 더욱 운치가 있겠다.
아지랑이 없는 들녘

오직 누렁소와 쟁기질 밖에 몰랐던 아버지. 흙을 떠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고 평생 동안 자식들에게 가르쳤던 아버지. 봄 아지랑이 피어오르면 여지없이 누렁 소를 끌고 들녘으로 나가 대지를 갈고 그 속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온 동네의 아버지들이 모두 소를 끌고 나와 쟁기질을 했다. 아리따운 소녀들은 아버지께 드릴 새참을 들고 민들레와 자운영이 흐드러지게 핀 논둑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녔다. 소년들은 망태를 짊어지고 소꼴을 베러 온 들녘을 누비고 다녔었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구나, 그 그림 같은 풍경을. 소년 소녀들은 모두 도시로 몰려가 돌아오는 법이 없고 이제는 들녘에서 아지랑이도 피어오르지 않는구나!”
삐비풀 무성한 논두렁에 서서 찰랑거리는 논물 바라보다가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시(詩) 한 수를 지어 들녘에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지랑이 없는 들녘
푸석해진 지붕 위로 풍년초가 솟아나면
우구구 우구구 참새 떼
봄바람 타고 춤추는 들녘
쟁기질하시던 아버지께
막걸리 새참 들어 나르던
그 예쁜 가시나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흰 수건 이마에 질끈 동여 메고
이랴차차 자랴차차 외치던 농부도 없이
들을 갈아엎고 아지랑이 씨앗을 뿌리던
그 창끝처럼 햇빛에 번쩍이던 보습도 녹슨 채 버려져
독쐐기풀만 무성한
아버지의 들녘
자운영 꽃 흐드러진 비탈진 논둑 아래
논바닥은 농부의 이마처럼 깊은 주름이 지고
쟁기 끌던 누렁 소는 신작로 가에 앉아
이삿짐 싣고 떠나가는 이웃집 식구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시냇물은 봄비에 흠뻑 젖어 흐르고
산들바람은 포플러 나뭇잎 사이에서
수런수런 옛이야기 속삭이지만
이웃집 뒷마당엔 주인 없는 개살구만 여물어가고
아버지의 봄들은
더 이상 아지랑이를 피우지 않는다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영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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