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리 평야 펼쳐지는, 월출산 아래 가장 너른 들녘 지남 뜰
나주 목사 임구령이 동호리-양장원머리 제방쌓아 만들어
삼한시대 때부터 존속해온 유서 깊은 마을…옹관묘도 발견
백리 배롱나무꽃길 영산로는 양지촌을 지나 지남마을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진면목을 드러낸다. 조그마한 재를 넘어 마을 초입에 이르니 활짝 핀 살구꽃이 나그네를 반긴다. 시조시인 이호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살구꽃 핀 마을은 언제나 고향 같고 어머니의 품처럼 따사롭고 아늑하다. 마을 골목마다 살구꽃이 만개하는 이맘때가 되면 당나라 시인 두목이 묘사한 행화촌(杏花村) 한 구절을 읊조리곤 한다.
청명(淸明)
두목(杜牧)
淸明時節雨紛紛 청명시절에 비가 보슬보슬 내리니,
路上行人欲斷魂 길가는 나그네는 넋을 잃을 정도로 서글퍼진다.
借問酒家何處有 잠깐 묻노니 주막이 어디메뇨.
牧童遙指杏花村 목동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르키네
지남마을의 역사와 유래

박찬환씨는 계속해서 말한다. “옛 지남터는 동호리 지적 28, 29번지가 장씨들 선산 기슭에 위치했다. 그 산을 북풍받이로 해서 33번지에 식수로 쓰던 샘이 있었고 30번지는 서당터라 했다. 45번지까지 옛 마을터로 추정된다. 38번지는 임야였는데 바다와 맞닿은 곳에 100평 정도가 평평한 바위였다. 바닷물이 빠지고 나면 시내바닥까지 그 바위 몸통이 드러나서 양지촌 갯논 언둑길로 마산리, 도장리, 해창리로 가는 돌다리 역할을 했고, 물이 들어오면 배를 대고 몸을 씻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자연히 동네 빨래터로도 이용되었다. 그래서 이 바위를 진암(津岩)이라 불렀는데, 지남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 바위에서 나온 것이다.”
박찬환 이장님댁 바로 맞은편에 과거에 진남사(津南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절터(113번지)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일제시대 당시 박상채씨라는 마을 사람이 절터를 밭으로 개간하다가 1자 정도 크기의 금불상을 발견했는데, 누군가가 일본인에게 그 사실을 밀고했고, 결국 그 일본인의 협박과 공갈에 못이겨 빼앗기고 말았다고 한다.
진남제(鎭南堤)의 전설

“조선시대 1550년 경 나주목사를 지낸 임구령이란 분이 영암 구림에 와서 여생을 마치기로 하고 주변 지세를 살펴보니 양장리와 동호리 사이의 물목이 수 백간(수백 미터) 밖에 안 되어 보여서 제방을 쌓아 농토를 만들 결심을 했다. 거의 제방을 다 쌓고 마지막 물막이 공사만 남았는데 물살이 세서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여 실의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 물막이 공사를 할 때 스님 다섯 명을 생매장하면 둑이 터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목사는 이튿날 공사 현장에 나가서 한탄했다.
“노인이 꿈에 한 말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재산도 다 털어 쓰고 없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한단 말인

임 목사는 이 말을 듣고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용기백배하여 있는 힘을 다해 공사 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그 날이 오자 약속한대로 스님이 나타나서 물 빠진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돌망태와 흙무더기가 쏟아지는 현장에서 안타깝게도 스님이 자갈에 미끄러지면서 흙무더기에 휩쓸려 들어가 매장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는 제방이 터지지 않았고, 그 스님이 바로 진남사에서 온 오중 스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더해 그 제방을 진남제라고 했다.”
이 전설로 미루어 보건데, 당시의 둑쌓기 공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