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리 평야 펼쳐지는, 월출산 아래 가장 너른 들녘 지남 뜰
나주 목사 임구령이 동호리-양장원머리 제방쌓아 만들어
삼한시대 때부터 존속해온 유서 깊은 마을…옹관묘도 발견

 
백리 배롱나무꽃길 영산로는 양지촌을 지나 지남마을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진면목을 드러낸다. 조그마한 재를 넘어 마을 초입에 이르니 활짝 핀 살구꽃이 나그네를 반긴다. 시조시인 이호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살구꽃 핀 마을은 언제나 고향 같고 어머니의 품처럼 따사롭고 아늑하다. 마을 골목마다 살구꽃이 만개하는 이맘때가 되면 당나라 시인 두목이 묘사한 행화촌(杏花村) 한 구절을 읊조리곤 한다. 
  
            청명(淸明)
            두목(杜牧)
       淸明時節雨紛紛    청명시절에 비가 보슬보슬 내리니,
       路上行人欲斷魂    길가는 나그네는 넋을 잃을 정도로 서글퍼진다.
       借問酒家何處有    잠깐 묻노니 주막이 어디메뇨.
       牧童遙指杏花村    목동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르키네
 
 
   지남마을의 역사와 유래

▲ 지남마을 초입, 영산로는 이 길을 따라 본격적으로 진면목을 드러낸다.
지남마을은 현재 40세대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현재 박찬환(70) 이장님이 말씀하시는 지남마을의 역사와 유래는 이렇다. “우리 마을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탑동에서 양지촌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이 언덕길을 탑골재라고 부른다. 1977년 권연수씨가 이 탑골재 정상에 500평 정도의 밭을 개간하던 중 옹관묘를 발견했다. 밭을 쟁기로 갈다가 소가 놀라길래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큰 항아리 모양의 옹관묘가 땅 속에 묻혀있었다. 영암문화원에 연락하니, 파손되어버렸으면 의미가 없다고 해서 그 기록은 그냥 묻히고 말았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우리 마을의 역사는 이미 삼한시대 때부터 존속해온 것으로 보인다.”

박찬환씨는 계속해서 말한다. “옛 지남터는 동호리 지적 28, 29번지가 장씨들 선산 기슭에 위치했다. 그 산을 북풍받이로 해서 33번지에 식수로 쓰던 샘이 있었고 30번지는 서당터라 했다. 45번지까지 옛 마을터로 추정된다. 38번지는 임야였는데 바다와 맞닿은 곳에 100평 정도가 평평한 바위였다. 바닷물이 빠지고 나면 시내바닥까지 그 바위 몸통이 드러나서 양지촌 갯논 언둑길로 마산리, 도장리, 해창리로 가는 돌다리 역할을 했고, 물이 들어오면 배를 대고 몸을 씻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자연히 동네 빨래터로도 이용되었다. 그래서 이 바위를 진암(津岩)이라 불렀는데, 지남이라는 마을 이름도 이 바위에서 나온 것이다.”

박찬환 이장님댁 바로 맞은편에 과거에 진남사(津南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절터(113번지)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일제시대 당시 박상채씨라는 마을 사람이 절터를 밭으로 개간하다가 1자 정도 크기의 금불상을 발견했는데, 누군가가 일본인에게 그 사실을 밀고했고, 결국 그 일본인의 협박과 공갈에 못이겨 빼앗기고 말았다고 한다.


   진남제(鎭南堤)의 전설
▲ 은적산과 모정마을이 마주보이는 지남들녘의 봄. 너른 들녘에 아스라이 보이는 마을 풍경이 정겹다.
마을 앞으로 일명 ‘십리들’이라고 불리어지는 너른 들녘이 펼쳐져 있다. 이 지남평야는 지금부터 약 450년 전에 나주 목사를 지냈던 임구령이라는 분이 지휘하여 동호리에서 양장 원머리에 이르는 제방을 쌓아 만든 간척지이다. 이 제방을 진남제(혹은 지남제)라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이 지남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1550년 경 나주목사를 지낸 임구령이란 분이 영암 구림에 와서 여생을 마치기로 하고 주변 지세를 살펴보니 양장리와 동호리 사이의 물목이 수 백간(수백 미터) 밖에 안 되어 보여서 제방을 쌓아 농토를 만들 결심을 했다. 거의 제방을 다 쌓고 마지막 물막이 공사만 남았는데 물살이 세서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여 실의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밤 꿈을 꾸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나타나 물막이 공사를 할 때 스님 다섯 명을 생매장하면 둑이 터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목사는 이튿날 공사 현장에 나가서 한탄했다.

“노인이 꿈에 한 말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재산도 다 털어 쓰고 없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한단 말인
▲ 지남마을 구릉지대에서 내려다본 지남들녘.
가?”라며 포기 상태로 멍하니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나타나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고 물었다. 임 목사는 자초지종을 말하고 모든 일이 생각대로만은 되지 않는다고 한탄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이 “백성을 위해 나라님도 못하는 좋은 일을 하시는데 부처님인들 어찌 방관하시겠습니까? 소승은 진남사에서 불도를 닦는 오중이라는 사람입니다. 몇 월 몇 일 날 물막이 공사를 할 수 있게 준비를 하시면 소승이 와서 돕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임 목사는 이 말을 듣고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용기백배하여 있는 힘을 다해 공사 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그 날이 오자 약속한대로 스님이 나타나서 물 빠진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돌망태와 흙무더기가 쏟아지는 현장에서 안타깝게도 스님이 자갈에 미끄러지면서 흙무더기에 휩쓸려 들어가 매장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는 제방이 터지지 않았고, 그 스님이 바로 진남사에서 온 오중 스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더해 그 제방을 진남제라고 했다.”

이 전설로 미루어 보건데, 당시의 둑쌓기 공사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 월출산이 시원하게 펼쳐진 지남들녘의 여름 풍경.
지남마을에서 십리평야를 내려다보면 답답했던 가슴이 확 터진다. 두 차례에 걸친 경지정리 결과로 농로와 수로가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450년 전의 모습은 이와는 많이 달랐으리라. 농로도 논두렁도 물길도 모두 지형대로였을 것이리라. 자연이 낸 길은 항상 구불구불한 곡선의 길이요, 인간이 낸 길은 늘 직선적이다. 직선의 길은 사람의 발걸음을 빠르게 하고 앞만 보게 만든다. 속도를 낼수록 더욱 앞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반면에 구불구불 제 멋대로 나있는 곡선의 길은 나그네의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천천히 걸을 때라야만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영산로는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자연의 길이다. 그러니 이 영산로를 따라 여행할 때는 가능한 속도를 줄이는 것이 좋다. 산과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들녘과 개여울과 논두렁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나무아래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들과 논두렁 가에 숨은 듯 피어있는 들꽃마저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나그네라면 응당 차를 버리고 터벅터벅 걷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리라.(계속)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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