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조음악의 산실...공연장 등 기념관 들어설 채비
깨금바위 등 김창조 선생의 체취가 곳곳에 서려
영암초등학교 개미명당 터...교문 없애 액운 막아


#용이 승천한 용추골 마을
▲ 가야금바위깨금바위라고도 불리는 이 바위는 김창조가 가야금을 연주하며 음악성을 키웠던 곳으로 애환이 서린 바위다.
영암읍에서도 월출산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은 동쪽부터 학송리, 개신리, 용흥리, 춘양리, 남풍리, 교동리, 회문리로 이어진다. 회문리는 영암읍 남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의 학교다리 건너편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월출산 천황봉과 구정봉, 향로봉 아래와 우측으로 군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천황봉이 바라보이는 산봉우리 아래 산중턱에는 조선시대 사직단(社稷壇)이 있었던 곳인데, 고을의 수령이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토신(土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낸 성스러운 곳이었다. 지금은 향토사단 예하의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군부대가 있는 능선의 오른쪽에 있는 계곡(큰골)아래 마을은 회문리 1구(녹암마을)이고 왼쪽의 골짜기(작은골) 주위의 마을은 회문리 2구(회의촌)에 속한다.

▲ 용치약수영암군이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군민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지난해 만든 약수터.
작은골(용치골)에서 흐르는 물은 김창조선생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깨금(가야금)바위 앞으로 흐르고 최근에 조성된 기찬랜드의 도백교, 국수교, 사성교 아래를 지나서 영암영애원 앞으로 흐른다. 영애원 앞 냇가는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동네 빨래터였다. 이 물은 벚꽃길과 이어진 회의촌교(會蟻村橋) 밑으로 흘러 영암초등학교 앞을 돌고 영암중·고등학교와 영암교육청 사이를 지나 북서쪽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이 하천가에는 수백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서 주위의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며 사람들은 여름이면 나무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피해 쉬기도 했으나 1930년대 일본인들이 전쟁물자로 이용하기 위해 모두 베어 버렸다.

▲ 용치골유원지1)유원지 상류의 전경. 2)유원지 풀장의 모습. 3)풀장과 김창조 공연장.
골짜기 위로는 개울의 맑은 물이 줄기차게 떨어져 용추(龍湫)를 이루고 40m 높이에서 길게 흐르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날 이곳을 찾으면 용이 승천하는 듯한 신비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 물속에 바위로 된 큰 굴, 작은 굴 등이 있어 헤엄을 잘 치는 어린이들은 이 굴 밑을 기어서 지나기도 했다. 가야금 바위(깨금바위)는 우리나라 모든 산조음악의 효시가 된 가야금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 선생(1856~1919)이 가야금을 연주했던 곳이어서 개금 또는 깨금바위라고 부른다. 주위의 풀과 나무는 관객이 되고, 산새들의 지저귐과 함께 계곡 길을 지나는 나뭇꾼의 아련한 타령과 가야금 줄의 애절한 가락이 한데 어울렸던 깊고 조용한 계곡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지난 2007년부터 자연을 이용한 인공 풀장이 조성되어 한여름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유원지로 변모되고 있다. 월출산 氣찬랜드 표지석 오른쪽에는 가야금기념관과 김창조 사당이 들어설 예정이고, 조금 더 위에는 氣건강센터와 친환경농업교육관이 있다. 더 위쪽 산 아래로는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 표지석 왼쪽에는 산조루(散調樓)가 세워져 있는 가야금동산이 있고 아래에는 김창조선생의 생가터를 복원할 예정으로 있다. 앞의 사성교를 지나 월출산 아래의 기산책로를 걸으면 국수교가 나오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도백교가 나온다. 강기천 장군, 조훈현 국수, 박준영, 이환의, 전석홍 전·현직 도지사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산책로는 가야금바위 위에까지 이어져 있는데, 앞으로는 왕인박사유적지까지 연결할 예정이다. 도백교 너머 하천 오른쪽 끝에는 새로 만든 용치약수터가 있다. 이 용치약수는 지하 130m맥반석에서 용출된 천연암반수로 물맛이 좋아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개미가 모이는 명당 터
회의촌은 호구총수(1789)에는 회의촌(懷蟻村), 행정구역 명칭일람(1912)에는 會蟻村으로 표기되어 개미가
▲ 영암중·고등학교영암지역 남학생들의 학문의 요람. 학교 앞의 하천은 용치골에서 부터 흘러내리는 물이다.
모이는 명당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영암초등학교, 영암중·고등학교, 보육시설인 영애원과 영애어린이집, 군부대 등이 있고, 여름이면 피서인파도 많이 몰려들고 있어 땅이름을 지은 선현들의 선견지명이 새삼 놀랍다.

영암중학교는 1946년 공립학교로 개교하였으며, 남녀공학이었으나 1971 동무리에 사립 영암여자중학교가 생겨서 그 후 남자중학교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영암고등학교는 영암중학교와 같은 캠퍼스내에서 1951년 10월 영암농업고등학교, 1967년 10월 영암종합고등학교로 개편하여 남녀공학으로 운영하여 오다 1975년 3월 영암여자고등학교의 개교에 따라 남자고등학교로 개편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영암영애원(아동복지법인)은 1951년 6·25동란때 부모형제와 집을 잃고 방황하는 무의탁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 개교 100년이 넘은 전통을 자랑하는 영암초등학교.
영암초등학교는 1908년 영암공립보통학교로 출발하여 1938년 영암서 심상소학교라고 바꾸고 1945년 해방 후 영암국민학교로 바뀌었으며 1996년부터 영암초등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풍수지리상 개미명당 터라서 개미구멍을 막으면 어린이들이 다친다고 해서 1980년 까지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교문을 달지 않았다.

1960~70년대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절대 가난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살았다. 그래서 초등학생들은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고 굶거나, 고구마 옥수수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다. 의복도 남루했으며 책과 공책은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둘러맸다. 신발은 검정고무신이 유행했는데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비오는 날이면 우산이 부족해서 나중에 집을 나서는 학생들은 비를 맞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비를 맞고 가는 학생을 보면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등 어려운 삶이었지만 인정과 공동체의식은 좀 더 강했다./영암읍=최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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