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을 닦는 정자, 옛 풍옥정에 도서관 들어서
좌의정 김수항 영암 유배시절에 대(竹)로 엮은 움막 터
지금은 학생·주민들의 학습장인 ‘정보문화센터’로 탈바꿈


     정보문화센터로 바뀐 풍옥정
▲ 김해김씨의 55세손 김연(영암김씨 시조)이 1392년 입향(入鄕)한 후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다는 교동리 마을전경.
봄이 오는 듯 하더니 꽃샘추위가 찾아와서 사람들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거리를 걷는다. 교동리는 옛 영암읍성의 서문 밖 언덕빼기 아래 지역으로 교리(校里), 동리(洞里), 서문밖(섬바께), 동외리(洞外里)마을을 합하여 지금은 교리의 교자와 동리의 동자를 따서 교동리라고 부른다. 고려가 망하자 김해김씨의 55세손 김연(영암김씨 시조)이 1392년 입향(入鄕)한 후 이 곳에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 밖 위쪽 성벽 바로 옆은 옛 풍옥정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영암군립도서관이 들어서 있고, 조금 아래에는 진주(진양) 하씨의 문중 재각인 영천재(靈泉齋)가 있으며, 언덕 길 50여m 아래에는 영암향교가 있다. 향교 앞은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있는 삼거리였는데 이 골목길 오른쪽에 낭산로가, 왼쪽에는 경찰서로 이어지는 큰길 등이 좌우로 뚫려서 지금은 오거리가 되었다.

▲ 영암향교의 대성전 모습
향교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고 50여m를 더 내려가면 한국농어촌공사 영암지사 건물이 있고 바로 아래에는 영암문화원·영암관광센터가 있다. 다리 못 미쳐 왼쪽으로 학교다리를 지나는 하천 너머는 회문리마을이다. 영암교(靈巖橋)는 영암읍내에서 초등학교로 가는 다리로 실내체육관 앞으로 우회도로(벚꽃길)가 개설되기 전에는 영암에서 목포·시종방향으로 가는 중요한 도로의 다리로 일명 학교다리라고 부른다.

영암군립도서관은 옛 풍옥정이 있던 곳인데 영의정까지 올랐던 김수항이 유배되어 이곳에 살면서 집 뒤에 정자를 짓고 풍옥정이라고 하였다. 김수항이 써 놓은 풍옥정기의 일부를 간추려 보았다.

김수항이 좌의정 시절, 朗州(영암)에 유배되었을 때 성(城) 서쪽의 군리(郡吏)집에 붙여 살았는데, 집이 여름이면 불에 그을리듯 뜨겁고 바람과 공기가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김수항은 살기가 답답하고 마치 찜통 속에 앉은 것처럼 괴로웠다. 그런데 집 뒤의 작은 언덕에 대밭이 있었는데 풀을 쳐내고 썩은 흙을 걷어내고 올라가서 바라보니, 전망(展望)이 시원하고 널찍하여 마치 티끌세상 밖으로 나간 것과 같았다. 그러나 폭양(曝陽)이 쪼이거나 비가 오면 오래 있을 수 없으니 햇볕과 비를 가릴 것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대나무를 엮어 조그마한 쉴 곳을 만들고는 책을 읽고 시를 읊으며 술잔을 당겨서 취하기도 하고 궤안(几案)에 기대어 단잠을 자기도 했다. 이곳에 정이 든 김수항은 이 대(竹)로 만든 움막을 풍옥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교동리 마을회관
지나는 객(客)이 “바람은 정자에 원래 있는 것이니 이름으로 마땅하겠지만 대로 엮은 움막을 정자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 또한 걸맞지 않은데 옥(玉)이라는 이름을 내걸려고 하니 격에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하였다. 김수항은 “소리는 비록 바람과 대나무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그것을 귀로 들을 때에는 모두 옥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옛날의 군자(君子)는 덕을 옥에 비유하였는데 이 덕을 갈고 닦는 진수(進修)의 법칙으로 하려고 정자에 옥으로 이름지은 것입니다.”고 하였다.

2006년 10월 이 터에 영암군립도서관이 세워져서 영암의 학생과 주민들의 정보문화센터로서 왕인아카데미 학습장과 다양한 문화강좌 등도 개설해 놓고 있다. 도서관 왼쪽 앞에 이번에 세워진 작은 건물은 휴게실로서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본관 2층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입구에는 ‘정보랑 문화랑’ 쉼터라는 예쁜 푯말이 붙어있다.

유서 깊은 향교가 있는 마을
▲ 옛 풍옥정 자리에 들어선 영암군립도서관
향교 옆 길가에는 유도회(儒道會) 영암군지부와 경서학원(經書學院)이 있는 유림회관 건물이 있다. 향교에는 왼쪽부터 공자의 제자들과 현유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典)과 학문을 갈고 닦는 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던 양사재(養士齋) 등이 있다.
영암향교는 1420년(세종2년) 역리3구 현재의 괴성계 부근에 현유의 위패를 모셔 제사하고 지방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달량진사변과 정유재란으로 향교가 소실되어 1603년(선조36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영암향교는 1918년 보통학교로 사용하던 중 모두 불탔으며 1922년 명륜당을 다시 세웠으나 1950년 6·25동란으로 다시 불탔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1951년 대성전, 1963년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1969년 명륜당을 다시 세웠고, 나머지 건물들은 이후 차례로 지었다.

향교 앞 골목길을 30m쯤 지나면 네 갈래 길이 나오는데 모퉁이에는 허드렛물로 사용하는 샘이 있었고 우측으로 조금 더 가면 식수로 사용하는 샘이 있는데 허드렛용으로 사용하던 샘은 지금은 메워지고 없다. 이 샘이 있는 골목길을 경계로 하여 읍성쪽 마을이 1구, 아랫마을은 2구로 나뉜다. 이 골목길은 낭산로로 잘리워서 낭산로 건너편으로 골목길이 이어지는데 30m쯤 안에는 2005년에 새로 지은 마을회관 건물이 있다. 회관이 있는 쪽에는 마을이 이어져 있고 앞에는 논밭이 있으며 너머에는 하천이 흐른다. 이 하천은 학교다리에서 회문리 용치골 물과 합쳐서 아래로 흐른다. /영암읍=최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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