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氣도로)가 생겨서 너무 좋아요”
산성재 나뭇꾼들 지게 위에는 칡뿌리가
남풍리 ‘남자시암’, 교동리 ‘여자시암’


산책로 옆의 조그만 소공원
▲ 소공원/왼쪽 건너편 건물이 영암실내체육관이고, 오른쪽으로는 매점이 보인다.
정월 대보름도 지나고 이제 농부들은 영농교육도 받으러 다니며 올해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이다. 환절기에 접어들고 밤낮의 기온 차가 심한 때문인지 이곳저곳에서 콜록콜록 거리는 사람들의 기침소리로 아침이 열린다.

지난해 여름, 용흥리 탑동 약수터에서 기찬랜드로 가는 산책로를 걷게 되었다. 남풍리를 지나는 길에서 산책을 나온 아주머니는 “무지하게 덥소. 지금이 더울 때이기는 한데 오늘은 바람 한 점 없이 저녁인데도 정말 덥소”라고 한다. 또 이 동네에서 산책을 나왔다는 아주머니들은 “산책로(기도로)가 생겨서 너무 좋아요”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길옆으로 어린이놀이터 등이 있는 작은 공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조그만 매점(공원매점)이 하나 있다. 음료수를 샀는데 아뿔사, 호주머니가 비었다. 주인 아저씨는 “그냥 마시고 (돈은)나중에 갖다 주세요”라고 말한다. 처음 보는 손님인데 믿고 주는 마음이 아름답다.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한여름의 저녁이었다. 주위를 좀 더 구경하다가 돈을 갚으려고 다시 들렀는데 할머니가 가게를 보고 있다. 할머니는 “마운데미(남풍리 언덕배기)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갔는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해서 다시 내려왔는데, 아파트를 사서 살까하다가 9년 전에 있는 땅에 집을 짓고 살았소. 그런데 집 앞으로 기(氣)도로가 지나가고 어린이놀이터가 생깁디다. 군(郡)에서는 이렇게 매점을 지어줘서 심심찮게 보내고 있다요”라며 주위에서는 ‘땡잡았다’고 한다며 웃는다.

며칠 전 소공원을 다시 찾았다. 겨울철이라 그런지 공원에는 사람이 뜸하다. 매점 앞에는 자판기가 놓여 있을 뿐이고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공원관리를 하는 최씨를 만났는데 의자에 앉아 담배를 한대 피워 물더니 “얼마나 얘들이 부잡한지 화장실을 고장내놓고 수도꼭지도 다 망가뜨려 놓았다”며 혼자 말처럼 중얼거린다. 잠시 후 화장실을 고치고 주위 쓰레기를 줍고서는 바삐 돌아간다.

▲ 산성재 입구/오른쪽 길로는 녹동서원 뒤를 지나 용치골로 가는 산책로이고, 왼쪽 길은 산성재 길이다.
소공원을 지나서 산책로를 조금 더 가면 산성재(대)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산성재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월출산 국립공원사무소에서 산행시 안전사고예방과 산불조심에 관한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안전사고예방 철저한 준비와 실천이 중요합니다. 충분한 물준비, 가벼운 준비운동, 체력에 맞는 코스선정, 무리한 산행금지, 음주·야간산행금지, 안전산행생활화, 노약자·어린이 산행자제, 지정된 탐방로 이용, 계절별 안전장구착용의무화(아이젠 등)의 내용이 적혀 있고 또 옆에는 산불! 지금 당신이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조심하면 ‘푸른 숲’, 방심하면 ‘검은 숲’ 아름다운 국립공원 산불 막아 보전하자! 하고 전국 각지에서 산불이 난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며칠 전 한라산에 오른 때문인지 산성재 길을 200여m쯤 오르자 근육이 뭉쳐서 걷기가 힘들어서 내려오고 말았다. 1960년대까지도 대부분의 집들은 아궁이를 나뭇가지, 톱밥 등의 땔감으로 밥도 하고 방을 덥히기도 했다. 그래서 아침이면 나뭇꾼들은 산성재길 등 산 아래로 난 샛길을 통해서 월출산으로 나무하러 가서 오후 해질녘이면 내려온다. 그들은 나뭇단을 칡넝쿨로 묶어서 뭉치를 만들어서 지게위에 보통 3단~ 4단씩 쌓는다. 지게 위에는 칡뿌리가 2~3개씩은 얹혀 있었는데, 아저씨들은 동네 아이들에게 낫으로 잘라서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칡을 밥칡, 물칡, 나무칡 등으로 구분했는데, 씹을 때 딱딱하고 아무 맛이 없으면 나무칡, 물만 픽픽 나오면 물칡이라고 불렀으며, 고소하고 밥 같아서 씹고 나면 찌꺼기도 얼마 남지 않는 칡은 밥칡이라고 했다.

물이 좋고 풍부했던 관청시암
▲ 영암김병원 앞 우물터/관청 샘이 있던 영암김병원 주변의 변한 모습.
수성사 앞길을 지나서 영암김병원이 있는데 병원 건너편에는 1960년대까지도 큰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물이 많이 나오고 맛이 좋아서 조선시대에 관청에서 이용하였다. 그래서 이 우물을 관청시암으로 불렀으며,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하였다.

역리에 사는 하씨(82)할머니는 “나이 20에 동무리 최씨댁으로 시집왔는데, 빨랫감이 말도 못하게 많았당께. 시부모에 남편, 아이들, 시동생, 시누이 등의 옷빨래·이불빨래 등 엄청 많았지. 그때는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것이 큰 일이었어. 추더리 냇가, 옥정샘에도 빨랫감을 가지고 다녔지만 남풍리 시암은 크고 물도 많이 나서 주위 마을의 아낙네들 수십명이 우물 주위에 모여들어서 빨래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야단법석이었지...”라며 새댁이었을 때의 힘들었던 시집살이를 전해준다.

교동리에 사는 또다른 하씨(84)할머니도 이 우물을 이용했다는데 “가뭄으로 교동리 시암이 마르면 남풍리 시암물을 퍼다가 채우기도 했지, 그래서 영암김병원 앞에 있던 시암은 남자 시암, 교동리에 있는 시암은 여자시암이라고 불렀어”라며 샘에 관한 재미난 별명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샘은 영산강 농업개발사업으로 농업용 지하수를 뚫으면서 수맥이 끊겨 그 흔적이 없어지고 말았다. /영암읍=최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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