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군서면 동구림리로고대 중국·일본 왕래한 무역항 ‥왕인·도선 등 ``역사적 거인`` 호적 담겨

군서면 구림마을

②마을유래

이은창 교수의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인용한 글은 구림(鳩林)이전의 땅이름을 ``이림성``(爾林城)으로 적고 있다. 그는 이(爾)음은 니(尼)음과 같이 ``니``로 ``얕(低)``의 뜻이며 ``림(林)``은 숲이고 ``성(城)``은 ``재``와 ``골``의 뜻으로 각각 풀어 ``얕숲골``(低林洞)이 구림의 백제지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강경구 박사는 옛부터 성소(聖所)나 시조신(始祖神)에 제사를 지낸 숲을 ``닭숲``(鷄林) 또는 ``비둘기숲``(鳩林)으로 일컬었다고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서``에 언급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구림 땅은 영암군 서종(西終)면 관할이었다. 1789년에 편찬한 호구총수에 기록된 동네를 보면 다음과 같다. 쌍취정(雙翠亭), 동계리(東溪里), 북송정(北松亭), 동송정(東松亭), 고산리(高山李), 취정(翠亭), 동정자(東亭子), 남정자(南亭子), 남송정(南松亭), 죽정(竹亭), 구림(鳩林), 국사암(國師岩), 상서호정(上西湖亭), 하서호정(下西湖亭), 학암(鶴岩)이었으며 일제에 의해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군서면 동·구림리가 되었다. 서종면 고산(高山)리, 동계(東溪)리, 학암(學岩)리, 쌍화(雙化)촌, 신근정(新根亭)은 동구림리에 속하고 율정(栗亭)리, 서호정(西湖亭), 남송정(南松亭), 국사암(國師岩)은 서구림리에 속했다.

현재는 동구림리 1구 학암, 2구 동계, 3구 고산이고 서구림리 1구 서호정, 2구 남송정과 배척골, 3구 신흥동, 4구 백암동으로 행정 마을이 되었다. 크게 한동네로 볼 경우 구림촌은 도갑리 죽정의 양지촌, 음지촌을 포함해서 쌍취정, 학암, 알뫼, 동계, 고산, 동정자, 북송정, 국사암, 남송정, 신흥동 등 12동네이다.

땅이름은 역사성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과 사회·문화적인 배경까지도 담고 있다. 이림, 성기동, 구림으로 이어지는 지명은 군서천과 구림천의 계곡수를 이용하여 수전(水田)을 개척하여 생산기반을 삼아 풍요로운 땅이 되었다. 영산내해(榮山內海)로부터 공급되는 맛있는 수산물, 조수(朝水)가 열어준 뱃길,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언덕과 송죽림 등과 함께 왕인과 도선이란 역사적인 거인들의 흔적을 담고 있다.

구(鳩)자를 모인다, 편안하다로 단순히 풀어 보지만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여 일찍이 요충지로 정해진 구림 땅은 안락의 땅으로 마을에 들어선 나그네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 하다.

구림촌은 영암군 행정구역의 중앙에 있는 군서면 중심마을이다. 동쪽은 도갑리 죽정동네이고 서쪽은 백암동 건너 학산천이 흘러 서호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은 배척골이 끝동네이고 북쪽은 백암동이 모정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위도상으로 대략 동경 126°36′08″∼ 126°38′58″, 북위 34°44′56″∼ 34°46′19″에 걸쳐 있다. 군서천(도갑천) 우금밑에서 학파들녘까지 동서방향으로 4.5㎞에 걸쳐 뜸과 동네가 늘어서 있다. 행정구역으로 정해진 동·서구림리의 면적은 1천290㏊이다.

구림은 고대 중국과 일본을 왕래한 무역항이었다. 목포에서 영산지중해를 타고 들어온 이곳은 전략적인 면에서도 요충지였다. 1944년 만든 학파방조제로 갯골이 차단되기 전에는 상대포까지 뱃길이 열려 있었다. 지역 어른들은 서호정 간죽정자 앞 굽이까지 물나들이었다고 한다. 40년 전까지 서호면 성재리에는 목포와 해창간을 왕래하는 배가 있었다. 20여년전 하구둑 준공으로 뱃길이 완전히 끊겼다.

1950년대 600호 3천800여명에 이르렀던 구림촌은 오늘날 400호에 1천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월곡리로 면사무소가 옮겨간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농촌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이촌향도(移村向都) 현상 때문이다. 앞으로 월출산 국립공원 기슭으로 왕인박사유적지와 더불어 관광촌으로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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