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으로 폐허된 영암향교 교동리로 옮겨가
배움의 전당, 재건학교는 사랑의 보금자리로

역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암읍의 관문역할을 하고 있다. 광주방면에서 영암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해 있어 예전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역(驛)이 설치되어 공무연락 뿐만 아니라 군사통신·조세운반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지금껏 역리이고, 당시 역에는 일정한 수의 마필(영보역 6마리)과 역정(驛丁)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의 KT&G 앞 서문밖길을 150여m쯤 내려가면 왼쪽으로 범바우길 표시가 있는 골목길이 있고, 100m쯤 더 내려가면 3구 마을회관이 나온다. 70m 더 아래에 구 향교길이 있고 산림조합으로 이어진다. 범바위길로 100여m쯤 가서 마을길 왼쪽으로 50m를 올라가 대숲을 한참 지나면 범바위가 나온다. 이 길은 험해서 역리에서 망호리로 가는 백룡동 잔등 우측의 영암파크와 우신빌라 뒷길(약 200m)로 가는 것이 편하다. 옛날에 범이 앉아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범바위는 영암출신 가수 하춘화가 부른 ‘낭주골 처녀’라는 노랫말에도 나온다. 이 마을 강씨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아이들이 범바위 주위에서 ‘자치기’ 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제법 유명한 곳이었다”고 지난 얘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지금은 잡풀과 잡목으로 우거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다만 옛 세월의 덧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영암종합운동장 건너편에 농산물품질관리원 영암지사 건물이 있는데 옆길(역몰길)을 100m정도 가면 구 향교길과 이어진다. 앞에 보이는 산등성이가 볼썽사납게 훼손되어 있다. 마을 김씨(57)아주머니는 “이곳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땅을 파 놓았다요. 뒤쪽 산등성이는 공원묘지부지인데도 저렇게 파 헤쳐놨소. 비가 오면 흙탕물이 온 마을에 흘러들어 진정도 여러 번 내었소.”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아주머니는 “이 마을은 교통이 편리해서 전에 살던 사람은 떠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이 많아 지금은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답니다. 사람은 자꾸 바뀌는데 마을은 변화가 없어요”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조용한 이 마을도 예전에는 전란의 폭풍이 휘몰아쳤던 때가 있었다. 조선시대 중기까지 영암향교가 마을 산등성이에 있었다. 을묘왜변(1555)이나 정유재란(1597)때 이곳은 병사, 유생, 민간인, 왜군 등 죽은 사람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악취가 너무 심해서 향교를 교동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또 언덕에는 임진왜란 때 전사자들의 제사를 모신 여배단(勵拜壇)이 있었으며, 여배단 아래 계곡에서는 괴상한 소리가 자주 난다고 해서 이곳을 괴성계(怪聲溪) 또는 고향교(古鄕校)가 와전되어 괴생계라고 불렀다고 하기도 한다. 마을 북쪽 길로 언덕을 넘어 산속에는 6·25때 죽은 이름 모를 인민군 병사도 묻혀 있다. 산 앞에는 조선시대에 말무덤이었던 곳으로, 6·25직후 이곳에는 뜻있는 인사들이 향토재건학교를 세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지금은 저소득 독거노인과 장애인들의 보금자리인 ‘달뜨는 집’이 지어져 사랑의 전령사 역할을 하고 있다.
역리에서 망호리로 넘어가는 백룡동 고개 왼쪽 언덕 위에는 영신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역리4구로 불리는 이곳은 예전엔 야산이었지만 공동주택이 보편화되면서 우뚝 솟은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수려한 경관의 월출산과는 썩 어울리진 않지만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의 흐름을 어찌 역행할 수 있으랴.
새로 조성된 장서동 마을
‘달뜨는 집’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야산 넘어 서쪽에는 모양새가 비슷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1970년대 말에 새로 조성되었다는 이 마을은 ‘영원히 빛날 것’이라는 의미로 장서동(張瑞洞)이라고 했다. 앞으로는 역리 5구로 분구될 예정이라고 한다. 마을입구에서 150m쯤 오르니 지은 지 2~3년쯤 된 마을회관이 있다.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마을 앞으로 군청이 옮겨온다고 해서 미리 집을 지어 들어왔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는 바람에 군청 이전계획이 무산되었다는 구만요”라며 다소 생뚱한 말을 전했다.
이 마을 송씨 할머니(80)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무지하게 더러웠소. 길도 포장이 안되고··· 무척 고생했지라.” 할머니는 23년 전에 이 마을로 이사왔다고 한다. 할머니는 “공설운동장, 체육관, 군청에서 하는 공사장 등 영암공사판에 안 돌아다닌 곳이 없소. 성격도 급한데다 일을 어찌나 억척스럽게 했는지 결국 탈이 나서 죽을 뻔 했소. 이제는 허리에 큰 수술을 해서 일도 잘 못해요. 지금은 밭일만 조금하고 있소.”라며 자신의 처지를 들려준다. /영암읍=최기홍 기자
영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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