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사 보선 누굴 뽑아야 하나?
¨내가 적임¨ 언론인·관료·노동운동출신 3파전

 

 오는 6월 5일 치러지는 전남도지사 보궐선거전이 일주일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유권자의 절반가량이 부동층으로 집계되고 있는 가운데 전남호를 이끌 도백 선출에 지역민들의 관심이 뜨겁다. 이에 본지는 도지사 후보로 출사표를 던진 3인의 인물탐구에 나섰다.<편집자 주> 

 

기호 2번 / 민주당 박준영 후보
기자출신 언론탄압 항의 해직
DJ때 청와대 공보수석 등 지내


▲ ▲58세 ▲영암 삼호 출신 ▲인창고-성균관대(언론학 박사) ▲전 청와대 공보수석
민주당 박준영 후보는 언론인 출신으로 청와대에서의 관료 생활을 거쳐 지방행정의 최고 자리인 도백에 도전했다.

박 후보는 해방직후인 1946년 영암군 삼호면 산호리(지금의 삼호읍)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삼호 용당에서 뱃길로 건너편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다녔다.

목포중학교까지 마친 박준영은 그러나 집안이 워낙 가난한데다 마치 부친마저 와병중이어서 고등학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부친이 사망했고 1년여를 고향에서 지낸 박준영은 "학교에 가자"며 서울로 향했다.

박준영은 서울에서 주간에는 직장에 다니면서 서울 인창고 야간을 졸업했다. 그는 "그 때 낮에 신문배달이나 중국집 등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학비를 보탰고 남는 것은 시골에 보내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일부에서는 소개란에 고교 학력을 잘 쓰지 않는 박 후보에 대해 "학력 콤플렉스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러나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며 "고향과 지역적 인연이 없어 안쓴 것일뿐 공식기록에는 다 밝혔다"고 말했다.

박준영은 1966년 성균관대학교 정치학과를 거쳐 1972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그러나 박준영은 기자생활 8년만인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언론탄압에 항의하며 제작거부에 참여했다가 해직됐다.

해직 이후 박준영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대우그룹에 입사, 기획조정실에서 잠시 일하다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85년 미국 오하이오대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박준영은 1987년 다시 중앙일보에 복직했다. 이후 뉴욕특파원, 통일, 정치2부장을 거쳐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이후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 국내언론 비서관, 대통령 공보수석 비서관 겸 대변인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했다. 2001년 9월 청와대를 나온 뒤에는 국정홍보처장으로 일했다. 국정홍보처장을 물러날 당시에는 세상을 들끓게 했던 이른바 `윤태식 게이트'와 관련돼 물러났다는 소문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출마회견때 "그와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박준영은 "살아오면서 80년 해직 당했던 것이 가장 큰 시련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해직후 취직도 못하게 해 방황할 때 몹시 좌절했었다"며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내적인 준비를 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박준영은 김대중 대통령(DJ)과 함께 일했던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DJ와의 인연은 1991년 뉴욕 특파원 당시 낙선후 미국에 강연차 온 김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부터다. 박준영은 DJ의 목포북교 19년 후배이기도 하다. 그는 "내가 평소 존경했던 그 분과 함께 일했고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이 가장 큰 영광이다"고 말했다.

박준영은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도 청와대에서 DJ와 함께 국정을 논의했던 경험을 내세우며 준비된 후보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호 3번 / 열린우리당 민화식 후보
9급서 시작 ‘성공한 행정관료’
행정전문가 해남 등 4곳 군수역임

▲ ▲64세 ▲해남 읍 출신 ▲광주고-전남대(행정학석사) ▲전 해남군수
민화식 후보는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학업을 마친 뒤 9급 공무원부터 군수까지 거쳤고 이제 도백에 도전한 `성공한 행정관료'의 전형이다.

민화식은 1939년 해남군 해남읍 남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해남동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농사를 짓던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는 동안 틈틈이 농사일을 도와야 했을 정도였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1955년 광주고등학교에 합격했고 주변 친지들의 도움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학업을 마쳤다.

민화식을 아는 주변 인사들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마음고생을 해 성장후에도 성격이 소탈했고 늘 어려운 사람 편에 서 있으려고 했다"며 "이번 선거에서도 서민도지사를 표방한 것이 그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신중하고 과감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성격적인 단점도 사실은 이런 성장환경에서 나왔다는 게 지인들의 평가다.

전남대학교 상과대 경제학과를 다니던 민화식은 대학 4학년때인 1963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 해남군청 산업과에서 공무원으로서의 첫발을 딛었다. 그는 이후 해남군청에서 전남도로 옮기며 승진을 거듭해 1971년에는 내무부로 발탁되어 갔다. 내무부에서는 지방국 새마을지도과, 주민과, 재정과 등을 거쳤다.

민화식은 이후 다시 전남도로 내려와 관선 곡성·강진·화순·해남군수를 지냈고 농정국장에 이어 지방공무원교육원장을 끝으로 민선 군수직 출마를 위해 1995년 명예퇴직했다. 이런 다양한 경력때문에 그는 자신을 `행정전문가'로 부른다.

공무원 생활 과정에서 민화식의 이런 승승장구를 두고 일부에서는 "쉴틈 없는 공부와 노력의 결과"라는 평과 함께 "처세의 결과"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를 지켜본 동료 공무원들은 "민 군수는 어떤 배경도 없는 사람이고 오직 실력으로 성장했다"며 "평소 학교 다닐때도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으며 공무원 생활 이후엔 각종 교육성적이 무조건 1,2위였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으로는 "관계를 중요시하고 처세를 잘 해 나온 결과"라는 평도 있다.

민화식은 1995년 민선 1기 해남군수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1998년 두 번째 도전에서 당선됐다. 첫번째 낙선은 민화식이 30년이 넘는 공직 생활 가운데 가장 큰 시련기였다. 고향에서 군수를 지낸 바 있던 그는 승리를 장담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낙선 1년만에 민화식은 부친상을 당하는 겹슬픔을 맛봤다.

이후 절치부심한 민화식은 2기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나서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했다. 무소속으로 민주당 후보를 제치고 군수직에 오른 그 선거는 그에게 가장 큰 영광의 무대이기도 했다. 똑 같은 군수직을 두고 천당과 지옥을 모두 맛본 셈이다. 민화식이 이번 도지사 후보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배경에 대해서도 이같은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평이 많다.

민화식은 이후 무난한 행정을 펼쳐 3기 단체장 선거에서도 재선에 성공했고 마침내 도지사 선거까지 출마했다.

 

기호 4번 / 민노당 김선동 후보
진보정당 지역대표 젊은 일꾼
학생·노동운동 투신…서민후보 표방

▲ ▲36세 ▲고흥 도화 출신 ▲순천고-고려대 3년 중퇴 ▲현 민노당 도당 위원장
김선동 후보는 빈농의 아들에서 운동권 학생으로, 노동 운동가를 거쳐 이제 진보정당의 깃발을 들고 전남 도지사 선거에 뛰어든 야심찬 젊은이다.

김선동은 1965년 고흥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흥도화초등학교와 도화중학교를 거쳐 순천고에 진학했다. 그는 순천고 진학을 두고 "공부 좀 한다는 사람이 모인다는 학교에 갔다"고 해 그의 학업 성취도가 높았음을 내비쳤다.

김선동은 고교 시절에 대해 "백범 김구의 `나의 소원'을 읽고 독립지사는 천대받고, 친일파가 득세하는 현실을 보면서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1985년 고려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나 그는 고교시절부터 몸에 익힌 민족의식과 시대모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김선동이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물고문 사건으로 숨져 6·10항쟁의 도화선이 된 서울대생 박종철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1986년 `건대사태' 이후 학생들에 대한 공안탄압이 극에 달하게 되는데 당시 고대에는 `애학회 사건'이 터졌다. 김선동은 "실제 나는 `애학회'와 관련이 없었지만 학생운동의 핵심이었기에 공안기관에 의해 연행되어, 대공분실에서 `물고문'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며 "다행히 사건과 관련이 없자 풀려났는데 그로부터 1주일 후 박종철 열사가 바로 그 곳에서 `물고문'으로 죽었다는 보도를 접하게 되었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불과 1주일 차이, 나 역시 그곳에서 죽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는 그는 "그 때 과학도로서의 꿈을 접고 책을 놓았다"고 말했다. 인생의 전환기였던 셈이다.

이후 1988년 미 문화원을 점거로 구속되는 등 학생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89년 울산 현대중공업에 들어가 90년대를 족장공(용접을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놓아주는 일)에서 용접공으로, 울산에서 광주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이런 전력은 그가 서민후보를 자부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김선동은 진보정당 운동에 합류,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당시 광주시지부 조직국장을 맡아 정치에 뛰어들었다. 이어 2003년 전남도지부장에 당선돼 도당 대표로 이번 선거에 나섰다.

김선동은 "이번 선거에 세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첫 번째는 한창 힘을 얻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성장세를 더욱 가속화하는 것, 두 번째는 민노당을 명실상부한 호남 제 2당으로 확정하는 것, 세 번째는 농민의 생존권이 걸린 쌀 투쟁을 전남을 시작으로 전국민적 투쟁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이자 의미다"

김선동은 "지역내 정당 지지기반이 약하고 도지사 후보로는 어리고 경험도 적지 않느냐"는 평에 대해서는 "민주노동당은 원내 제3당이며 진성당원은 가장 많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금 나이는 김민석 전 의원이 서울시장에 출마하던 때와 비슷하고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는 시대에 젊은 도지사도 어울리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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