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구심점 ‘사랑방 문화’ 사라져 아쉬워취운·월암·명천·호은 등 큰사랑 큰 족적 남겨

 

-외지인들 숙소로도 활용-

망호리는 청소년이 모여드는 ‘아사랑’, 중·장년이 모여드는 ‘중사랑’, 그리고 노인들이 주로 모이는 ‘노사랑’이 있어 연령에 따라 횡적 유대기능을 대행해줬다. 그러나 사랑방 문화에는 부정적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아사랑에 가면 담배를 배운다든지, 잡기를 알게 된다든지, 음담패설을 익힌다든지 하는 것 등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많았다.


그 중에 오이용, 후정리 고삿집, 배날리 한길현씨 아사랑이 매일 붐볐다. 새끼 꼬고 짚신을 삼으며 방석이나 멍석을 짜는 농공예의 기법을 전수받고 익히기도 하는 곳이었다. 이웃 송평리, 장암마을과 겨루는 불싸움(돌싸움 혹은 풀싸움이라고도 함) 작전본부이기도하여 애향심을 기르는 청소년행사의 본거지가 아사랑이었다. 여름철에는 물놀이와 천렵을, 겨울철이면 들오리 잡이, 겨울놀이를 함께 하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그와 반면 중사랑은 마을농사나 농청(農廳)의 본거지였다. 이 마을의 중사랑은 딱히 장소가 정해지기보다 동네이장, 반장집이나 서당도 때로는 중사랑 역할을 했다. 각종 공동작업이며 관혼상제, 다리를 놓고 길닦는 공동사업은 중사랑에서 많이 이뤄졌다.


또한 마을을 찾은 객(客)이나 소금장수, 새우젓장수, 미역·멸치·김 봇짐장수와 땜장이, 상고치는 사람들의 숙소로 제공되었기에 외지의 정보를 듣는 공간이기도 했다. 마을 안에 중병을 앓거나 장애인, 그리고 상중에 있는 사람의 농사를 공동으로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 아름다운 상부상조하는 복지문화와 인간적 유대공동체의 정신력이 이뤄졌다.


노사랑은 사랑채(집)를 별채로 갖추고 경제력이 있고 학식과 덕망이 있는 주인이 주석하고 있다. 그래서 망호리에서는 노사랑을 대개 ‘큰사랑’이라고도 한다. 큰사랑 주인은 동네와 지역사회의 어르신이었다. 이 가운데 망호정 취운 이원우, 후정리 월암 서기운, 배날리 명천 강학성·호은 김재균씨 등이 큰사랑 어른으로 꼽을 수 있다.


-농촌인심도 사라져-

취운선생은 진사 취벽공의 친손자로 광주농림학교를 수학하고 우체국, 군청에서 근무하다산업조합을 창설했다. 간척지를 막아 농토를 개간하기도 했다. 큰사랑에 걸려있는 ‘취운제’의 당호에 걸맞게 항상 근검절약하는 자세, 검소한 옷차림, 손님들에게는 극진한 대접, 애경사의 지원과 이웃의 구원을 정도로 살아온 분이다. 그는 생전에 ‘취운기사’ 2권을 남겨 후손들은 2006년 ‘취운일기’라는 이름으로 번역본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 월암 서기운 선생은 홍참판 등 명문가와 명리학 대가 등과 교류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했다. 그는 평생을 학문에 뜻을 두고 교학을 널리 펴서 후학들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명천 강학성 선생은 신·언·서·판을 두루 갖추어 격조 높은 품격으로 사랑방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단아한 풍모를 갖추고 인애로서 이끄셨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망호리 마을부근에 세워진 호은 김재균 선생의 비석 .
호은 김재균 선생은 영농과 해운업으로 자수성가하여 마침내 이 마을에서 대성한 입지전적인 분이다. 슬하에 10남매를 두고 자녀 교육열이 강하여 세 아들과 장손 등 네명씩이나 일본유학을 시켜 각계에서 두각을 발휘하고 있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위선사업에 힘써 효자로도 회자되고 있다. 이웃마을 극빈가정을 돌보고 언제나 과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긍휼을 베푸는 선덕으로 당대 만인이 선망하는 고을의 큰사랑 어른으로 추앙받았다.


후에 그가 간척했던 해창들 어귀에 영암군수가 추진위원장이 되어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오가는 길손들의 시선을 모았다.


망호리는 이외도 이공우 큰사랑 등 크고 작은 사랑방이 다수 있었다. 이들 사랑방 중에는 현재 건물이 현존하는 사랑방은 겨우 1~2개에 불과하고 모두 사라지고 없다. 큰사랑은 향약의 집행소이자, 향약을 위배한 사람에게 제재를 가하는 재판소 역할을 했다. 농한기에는 큰사랑 앞 넓은 마당에서 풍물놀이, 창, 연극 등도 펼쳐졌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 농촌문화는 사랑방에 집약되었다 해도 대과 없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문화의 횡적 유대기능이 약화되면서 사랑방 문화가 쇠퇴하게 되었다. 농사의 기계화·약품화로 공동작업이 필요없게 되었고, 농촌자치의 향약문화가 빛을 바래 농촌을 구심시킬 기능이 없어진데다 TV의 보급으로 횡적 유대의 기회나 필요성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훈훈했던 인간적 유대는 차단이 되고 농촌인심이 전과 같지 않으니 이 사랑방 문화의 단절이 몹시 아쉽기만 하다. <다음호에 계속>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서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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