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탈정책으로 소작농가 ‘핍박생활’일본인 스가하라 ‘황천’ 술 제조판매

 

일제시대 한 일본인에 의해 제조 판매된 주조장이 영암읍 회문리 영암초등학교 뒷편에 있었다. 당시의 주조장 굴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우리민족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주권을 잃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주권을 상실한 것은 훨씬 그 이전인 1905년 일본인들에 의해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부터였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전통사회를 해체하고 재편성했는데 그 1단계가 1906년부터 1918년까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농토수탈 체제확립’이었다. 2단계는 1919년부터 1929년까지 ‘일본상품시장 확대 및 일본자국의 공업발전을 위한 원료공급 체제확립’이었다. 3단계는 1930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전시수탈과 전시인력동원(징병과징용) 체제확립’이었다.


1912년 공포된 ‘조선토지조사령’에 의해 경작토지 35만7천여 정보, 임야 294만 정보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시켰으며, 그 일부를 우리나라에 이주해온 일본인들에게 불하하여 일인들의 경제활동을 도와주었다. 총독부의 토지강탈정책 결과 소작농가가 급증했다.


더구나 소작료를 타조지에서 탈곡 후 6할을 일본인 지주의 소유로 책정한 타조(打租)방법을 택해 민중의 삶은 더욱 짓눌린 비참한 생활이었다. 결국 소작농가의 생활수준은 최하위에 맴돌았고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이로 인해 농가부채는 점차 늘고 거지 떼가 전국에 6만명을 넘었다.


회의촌에도 홍서방이라는 홀아비 거지가 동각(지금의 마을회관)의 부엌에서 어느 날,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 당시 지금의 영암초등학교 다리 밑은 거지 떼의 소굴이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온 가족이 밤 보따리를 싸 만주 간도지방까지 흘러들어갔다.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는 열차 속에서 밤을 지새다보면 ‘칙칙폭폭…칙칙폭폭’의 증기기관차 소리가 마치 북간도로 가는 길목의 나진과 회진을 연상시키는 ‘나진간다…회진간다’의 여음을 남겨 고향 떠난 허전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 무렵에는 “밤 보따리 쌌다네” “나진간다, 회진 간다” “타조하러 간다”는 말이 유행했다. 또 “타향살이 10여년에 청춘만 다 늙어…”라고 노래하며 타향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은 많이도 울었다.


일제시대, 회의촌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지금의 영암초·중고교 부근에 많이 살았다. 영암중고교와 교육청 일원에는 효오도(兵頭)의 집이 있었고, 영암초등학교 뒷편에는 스가하라(管原)가 월출산의 맑은 물로 ‘황천’(黃泉) 이라는 정종 술을 제조하여 일본에까지 판매했다. 지금도 주조장의 굴뚝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 영암초등학교 정문 건너편에는 우에하라(工原)가 학용품과 담배, 교과서를 독점 판매했고, 그 옆집에는 모로오까(諸岡)라는 중년의 여교사가 과부로 살고 있었으며, 바로 이웃에는 소오류우(小柳)가 정미소를 지어 정부미 도정 일을 독점했다. 현재 하남장학회 하대주 회장의 공장이 바로 이곳이다.


당시 성 불구자였던 효오도는 서남리에서 정류소를 운영하던 친구 데이(出井)에게 부탁을 하여 그의 부인과 잠자리를 주선, 딸 셋을 두기도 했다. 나중에 그 딸들이 커서 조선 아이들이 곁눈질을 하며 지나가면 “저기 조선의 거지들이 간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또 우에하라는 별다른 이유 없이 조선 사람들의 뺨을 때려 코피를 흘리게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항변도 제대로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다. 당시에는 이처럼 일본인들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살았다. 나라 잃은 서러움을 톡톡히 맛보야 했던 것이다.


이 같은 핍박과 억압의 삶 속에서 여자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했다. 그 무렵, 결혼 적령기는 보통 17~8세였다. 온 겨레가 고통 받던 시대였으므로 가족과 동포들끼리라도 화목하게 살아야 했다. 하지만 갓 시집간 여자들은 혹독한 시집살이에 목숨을 끊기도 했다. 시집살이의 가장 큰 어려움은 고된 노동이었다.


“소를 잃으면, 며느리를 얻어라” 이는 시집간 며느리가 황소 한 마리의 몫을 해낸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며느리를 눈 위의 가시처럼 미워하는 시어머니도 많았다. 이런 학대를 견디다 못한 성전댁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착한 성전댁은 시누이와 시어머니의 잦은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목메어 죽어버린 것이다.


“5리 물을 길어다가 10리 방아 찧어다가 아홉 솥에 불을 때고, 열두 방에 자리 걷고…” 당시 유행했던 민요의 한 구절처럼 며느리들은 속절없이 일만 해야 했다. “시아버지 호랑새요, 시어머니 꾸중새요, 시누이는 뾰죽새요, 남편은 미련새요, 나는 썩은새니,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 이 또한 당시 고통 속에 살아야 했던 여인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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