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천 장군 등 각계 인물 다수 배출악성 김창조 탄생지로 새롭게 발돋움


   

김창조 선생

강기천 장군
조훈현 국수
회의촌에는 최근 가야금산조 축제의 중심인물인 악성 김창조가 태어난 곳이다. 그는 1856년 7월, 이 마을 동묏(豚山)떼 바로 아래에서 태어났다. 율객의 집안으로(당시 율객은 천민 신분) 마을사람들로부터 천시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어려서부터 마을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렸으며 혼자 동묏떼의 북바위에 앉아 가야금연주에 열중했다. 용추 골짜기, 개금바위의 한적한 곳은 그가 공부할 수 있는 주무대였다. 1890년경 그는 천부적인 음악적 감각으로 불후의 명작 가야금 산조를 완성함으로써 우리나라 산조음악의 비조가 되었다. 그의 명성을 알고 찾아 온 안기옥, 한성기, 김병호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에게 가야금 산조를 전수하고 제자들과 함께 보성·벌교·순천 등지를 찾아다니며 연주활동을 했다.

나중에 영암에서 전주로 거처를 옮겨 연주활동을 했지만, 양반들과 어울리지 못해 그의 생활은 언제나 빈곤했다.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이 가진 자들의 초청을 받아 연주를 하면서도 흥행과 영업위주의 연주를 거절하고 애절한 ‘창’의 예술세계를 추구하는데 모든 정열을 쏟았던 외고집으로 굶주린 모습을 보았듯이 김창조의 예술 활동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전주에서 제자들이 마련해 준 회갑연을 연 뒤 다시 거처를 광주로 옮겨 가야금 산조의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919년 8월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했다. 민중 음악사에 길이 빛날 발자취를 남긴 악성 김창조는 그렇게 떠났지만 그가 남긴 산조음악은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도옥 김용옥은 “나는 산조음악이 없었다면, 조선에 태어난 맛이 없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또 회의촌이 낳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박판종씨(작고)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인물로 대학졸업 후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미 군정청 시절(1946~1948) 문교부장관이었던 안호상 박사와 동기생이자 막역한 사이로 학창시절 방학 때면 안호상 박사가 회의촌에 오랫동안 체류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그의 장남 종오씨가 서울고등학교 재직시절 27세 때 전라북도 학무과장(현 도교육감)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31세 때 함평군수를 지냈고 수년 후 그의 나이 35세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했던 박판종씨는 일본 경찰이 주야로 감시하여 거동이 쉽지 않았다. 이때 아버지 박용삼씨는 병신처럼 집안에만 칩거하고 있는 아들 보기가 딱해 일본인 경찰서장을 찾아가 상담했다. 그 결과 영암면장을 하면 감시망을 풀겠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36세 때 영암면장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 같은 처지를 한탄하며 매일 폭주를 일삼아 살아가다가 40세 때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강직한 그를 마을사람들은 스승처럼 추앙했다. 그의 아들 가운데 차남이 구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언론인 박종관씨다.

또 회의촌 출신으로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한 강기천 장군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생활에 대해선 매우 엄격했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친구들과 싸운 적이 없었다. 용모가 남달리 단정했던 그는 유소년기에도 노트정리며, 연필깎기 등 까지도 깔끔할 정도였다. 그는 비록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강직했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 바둑계를 대표하는 조훈현 9단(체육학 박사)도 회의촌 출신으로 그는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알려져 있다. 직선적이면서도 쾌활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그는 한때 줄담배를 피울 정도로 애연가였으나 지금은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그의 큰 누이 조복심 여사는 여교사로 활동했고 작은 누이 조경자 여사는 이사관으로 정년퇴임했다.

이외에도 교육자 가운데 조규출 교장은 덕망이 높아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6.25때 순직했다. 자녀로는 육군 중령으로 퇴임한 조창현, 중앙청 이사관을 역임했던 조팔만, 교수 조구현, 교사 조정자 여사 등이 있다.

“돈이 탐이 나거든 교직을 떠나라”고 말했던 청백리 교육자 박기수 교장은 교육이론가로서 현장수업 기술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자녀로는 조선대학교 박강철 교수, 강원대학교 박인철 교수, 간호대학 박명희 교수, 박송희 교수 등이 있다.

서울대 사범대학을 나와 서울시 중부교육청 교육장과 서울시 각급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조명현씨는 ‘1일 3성’을 생활화했던 후덕한 분으로 학덕을 겸비한 선비로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교육청 관리국장을 역임한 김명원씨는 온후한 중용의 덕을 갖춘 전형적인 회촌사람으로 그의 태생지는 악성 김창조 생가 터와 이웃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라남도 교육위원회 위원과 의장을 차례로 역임한 뒤 민선4기 영암군수에 당선되어 ‘풍요와 희망의 활기찬 새 영암’이라는 슬로건으로 군정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김일태 군수가 회의촌 사람이다.<계속> /영암신문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조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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