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끝난 후 밤새워 줄다리기하며 시름 잊어
처녀가 시집가 아이 낳으면 젖 내놓고 다녀


영차~힘내라! 힘! 위뜸과 아래뜸이 나눠 줄다리기를 했던 회문리는 나중에 남자와 여자, 녹암마을과 번갈아 가며 밤새워 줄다리기를 했다. 지금은 초등학교 운동회 때나 겨우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힘을 합하고 서로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기 힘든 사회였다. 밭농사로는 주로 보리, 콩, 팥, 녹두, 기장, 조, 메밀 등의 곡식류와 채소류, 목화, 삼, 모시, 뽕 등 옷감재료 작물을 가꾸었는데 특히 보리, 조, 콩, 메밀밭 매기가 가장 힘들었다. 밭매기는 호미로 잡초를 제거하고 솎음질과 식물의 뿌리에 산소를 공급함으로써 작물을 자라도록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손질이었다.

다시 말하면 호미로 밭을 매지 않으면 수확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밭매기는 주로 무더운 여름철에 하기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모시 적삼이 땀에 젖어 다 찢어지도록 콩밭 매던 어머님의 모습이 이때의 잊지 못할 여인상이었다. 너른 밭을 혼자서 모두 맬 수 없어 이웃끼리 품앗이로 공동작업을 했다. 동트기가 무섭게 싸리문을 열고 밭으로 나가면 별이 보이는 초저녁까지 뙤약볕에서 하루종일 밭을 매었다. 밭매기는 여자가 전담했다.

어린 아이의 젖을 먹여야 할 부녀자는 아이를 밭가에 뉘어 놓고 때맞춰 젖을 먹였다. 젖먹일 때마다 젖을 냈다 넣었다 하기가 귀찮았으므로 이때의 부녀자들은 언제나 젖을 내놓고 살았다. 이 무렵의 결혼 적령기가 열일곱, 열여덟 살이었으므로 결혼 1년 후에 애기를 갖게 된 열아홉 이후부터는 처녀 때 감추고 다녔던 젖을 드러내놓고 다닌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는 아무 이상할 것이 없었다. 마을 어디에서나 출렁거리는 젖을 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여자들이 젖을 감추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이 이 땅에 상륙한 이후 1946년 무렵 부터서다. 미국식 생활양식의 영향으로 ‘브래지어’라는 젖가리개를 쓰게 되었다. 어떻든 콩밭 매는 여인들의 호미질은 그만큼 바빴던 것이다.

논농사는 주로 남자의 몫이었다. 논농사에서 가장 힘든 일은 모심기와 김매기였다. 김매기는 세 차례 하였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김매기가 가장 힘들었다. 세 번째의 김매기는 8월 중순경 하는데 마지막 김매기를 ‘만드리’라고 하였다. 만드리가 끝나면 마을 지주들이 술과 음식으로 잔치를 베풀어 일꾼들을 위로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날은 춤추고 노래하며 즐기는 마을 일꾼들의 축제였다. 이때의 사람들은 모두 잡곡밥을 먹고 살았다. 조밥, 콩밥, 메밀죽도 감사했지만 흰쌀밥 먹기를 누구나 소망했다. 부자는 쌀에 잡곡을 덜 섞었고, 보통 사람은 잡곡 투성이로, 가난한 사람은 순 잡곡밥이나 메밀죽을 먹고 살았다. 이 무렵, 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 쌀밥 도시락을 싸오면 모든 학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런 가난했던 생활 속에서도 즐거움은 있었다.

추수가 끝나면 볏짚으로 새끼를 꼬고, 새끼로 줄을 틀어 줄다리기 준비를 했다. 회문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용추골 시냇물을 기점으로 해서 시냇물 위쪽마을(남쪽)을 위뜸(웃때미), 냇가 아래쪽 마을(서쪽)을 아래뜸(아랫때미)이라고 했는데, 첫 번째 줄다리기는 위뜸과 아래뜸의 겨루기로 시작됐다. 서로 이기려고 자기편 사람들을 동원하기에 분주했고 농악을 울리면서 기를 썼다. 한참 줄다리다가 지치면 줄을 깔고 앉아 쉬면서 끓여온 닭죽과 막걸리를 마신 후에 다시 줄다리기를 했다. 힘없는 노인들은 “마당쇠야!” “개똥이 놈아!”하고 돌아다니면서 응원했다. 먹고 쉬며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마을사람들의 옷이나 머리카락에는 늦가을의 된서리가 하얗게 내려 희끗희끗했다. 상품도 없었지만 그저 밤새워 즐겼다. 이 경기가 끝나면 며칠 후에 남자 대 여자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이 줄다리기 또한 밤새도록 거송이 우거진 마을 한 복판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남자는 징과 꽹과리로 여자는 북과 장구를 치며 응원했다. 결과는 언제나 여자편이 이겼는데 “여자들은 줄을 끄는 팔의 힘이 남자보다 센 것”이라며 남자들은 투덜거렸다. 이처럼 위뜸과 아래뜸, 남자 대 여자의 줄다리기가 끝나면 이웃 누암(녹암, 회문리1구)마을과 줄다리기를 했다. 누릿뜰 앞 도로(영암-목포간 지방도)를 중심으로 회촌 쪽과 누암 쪽으로 늘어서서 줄다리기를 했는데 두 부락 주민들이 온통 참가했다. 줄다리기를 하는 날엔 농악소리가 온 들에 밤새 울려 퍼졌고 역시 쉬어가며 하루 종일 밤낮으로 줄다리기를 했다.

이때 누암에서 회촌으로 머슴살이 온 사람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 머슴들이 누암 쪽에서 줄을 당기면 “넌 누암 사람이지만 회촌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으니 회촌 편에서 당겨야 한다”고 머슴 주인이 회촌 쪽으로 끌고 오면 누암 쪽에서는 “누암 사람이니 누암 편에서 당겨야 한다”고 다시 끌고 가는 일도 벌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머슴들은 줄 주위를 빙빙 돌며 도망쳐 다녀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끌어오고, 끌려가고, 도망치고, 붙잡으러 다니면서 소리치고 웃고 즐기는 동안 마을사람들은 모든 시름을 잊었다. 가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변변치 않으면서도 초가삼간에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그들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까.<계속> /영암신문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조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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