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온 삶의 보금자리영산강 물줄기 따라…곳곳 삶의 애환 재조명


▲바다가 육지로 변한 영암군의 옛 지도
호남문화가 한 지역문화로서 독특한 모습을 갖는다면, 그 중의 한 부분은 분명히 영산강과 그 연안에 펼쳐진 천혜의 평야지대라는 자연환경에서 잉태된 것일 게다. 지금도 영산강과 이 지역은 여러 면에서 긴밀한 상관관계를 지니지만, 특히 그것은 고대로 소급해 올라갈수록 크고 명확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인접한 어떤 문화에 부속된 아류적인 것이 아니고 독특한 문화배경을 지닌 중심문화였다. 실제 지석묘나 청동기시대의 유물, 그리고 옹관묘와 같은 특수한 문화유산들이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증거물들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고장 영암의 선사문화유적은 서호면 장천리의 선사주거지와 수많은 지석묘군을 들 수 있다. 이들 유적과 관련되는 유물로서 다양한 석기·청동기 유물들이 학계에 소개되고 있다. 영암군에 최초로 주민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였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유적으로는 주거지와 지석묘, 청동기시대 유물들을 꼽을 수가 있다.

다음으로 청동기문화에 이어 철기문화로 불리우는 한 단계 발전된 생활을 영위한 시대가 도래한다. 이 문화의 특색은 석기나 청동기 대신에 철제의 도구가 사용되고 토기도 무문토기에서 이른바 김해식 토기로 불리워지는 경질토기(硬質土器)가 사용되며, 묘제도 지석묘 계통이 점차 소멸되면서 토광묘와 옹관묘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 때가 바로 역사상의 삼한시대, 즉 마한시대에 해당한다.

마한은 대체로 서기 369년(백제 근초고왕 24)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영암지역을 포함한 영산강유역 혹은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의 모든 소국(小國)들이 일괄적으로 백제에 완전 복속되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의문이다.

▲바다가 육지로 변한 영암군의 지금의 모습
이후 백제시대 영암지역에는 월나군(月奈郡) 이외에 아로곡현(阿老谷縣)과 고미현(古彌縣)이라는 두 개의 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이 시기의 군현은 지금의 군이나 조선시대의 군현들처럼 뚜렷한 상하 행정편제와 명확한 관할범위를 갖는 것은 아니었으며, 대체로 촌주격의 토호들에 의해 지배되었으리라 판단된다. 대체적으로 이들 3군현의 위치는 ▲월나군이 현재의 영암읍·군서면·덕진면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아로곡현은 금정면의 북부와 나주시 세지면 등지 ▲고미현은 미암면·학산면·삼호읍 일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제까지 영산강유역의 마한~백제시대 유적은 반남일대를 중심으로 시종면 정도만이 유념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사실상, 이들 3고현의 고지와 연관시켜 유적과 유물이 폭넓게 조사돼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백제시대의 영암지역 문화를 조명할 때 왕인박사를 빼놓을 수 없는데, 왕인(王仁)이라는 인물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관심거리다.

이후로 통일신라시대 영암의 역사적 지위는 이른바 나말여초로 지칭되는 통일신라말~고려초기의 격변기를 맞으면서 새롭게 변모되어 갔다. 즉 왕건과 궁예가 영산강유역의 나주일대를 그 쟁패의 대상으로 삼고 치열한 격전을 치루고, 또 그 결과로서 새로운 고려왕조가 성립되던 시기에 영암은 면모를 일신하여 호남의 대군(大郡)으로 성장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는 영암군은 전남의 서남단과 중앙지역의 중간적 역할을 해주는 지역으로서 영산강이 군의 서부지역으로 흘러들어 농업과 수산업에 영향을 끼쳐왔으나 영산강 개발사업으로 바다가 육지가 되면서 공단이 들어서는 등 큰 변화를 불러왔다.

이에 본지에서는 세월의 흐름에 점차 잊혀져 가는 지역의 역사·문화·생활풍습 등 옛 모습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는 대장정을 시작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본지 명예기자단과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이 참여하고 더 나아가 지역의 향토사학자 또는 뜻있는 인사들이 함께 동참해줄 것으로 기대해마지 않는다. /문 배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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