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한민당계열 인사 경계 내각서 배제
한민당 반독재 투쟁 선봉 험난한 야당의 길
인촌 총리지명에서 제외
김성수는 한민당 당수이며 동아일보 창설자로서 한민당과 동아일보를 배경으로 이승만 박사를 적극 지원했지만, 이승만 박사는 정당의 당수가 국무총리가 되면 일하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총리지명에서 제외시켰다. 마지막으로 낭산은 공산당 당수를 역임했으나 8·15 해방 후에는 좌익계열과 중간세력을 격렬하게 공격해왔고, 연부역강하며 지혜롭고 용기가 있어 영향력이 크고 한민당 출신이기 때문에 은근히 경계하고 우려하여 국무총리로 지명하지 않았다.
한편 이승만 박사는 은근히 우회해서 ¨국무총리는 상징적인 지위로 비서직 같은 거야. 중국의 송자문은 재정부장(재무장관)으로 실권을 행사했소. 김성수는 재무장관이 적격이야. 건국의 어려운 시기에 재무장관이 제일 중책이며 능력과 재력, 그리고 인품이 원만한 김성수씨가 맡아야 되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김성수는 일생을 통해 가장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분노했다.
또 이승만 박사보다 7년 연상인 이시영 부통령이 문교장관으로는 한학자 정인보 선생이 가장 적격자이므로 문교장관으로 등용하도록 수차 간곡히 진언하였으나, 이승만 박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만 박사는 미군정의 일을 맡았던 인물을 핵심부에 중용시키려 하지 않았으니, 장택상이 미군정 때 수도청장과 경기도경부장으로 경찰행정과 치안에 경험이 있고, 수차에 걸쳐 생명을 걸고 위기를 넘겼으며 공산당과 싸워온 국가의 공로자라고 등용을 요청하자, 이 박사는 ¨장택상씨는 내무장관은 안 돼.¨라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또 미군정 때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은 내무장관으로 등용시키지 않고 특사의 자격으로 외국으로 내보냈다.
이승만과 임영신의 로맨스
특기할 만한 일은 상공장관으로 허정을 내정하였다가 도중에 돌연 미국에서 돌아온 임영신으로 변경한 사실이다. 임영신을 상공장관으로 임명한 이유는 외국원조 관계사무를 상공부에서 전담했기 때문에 미국유학을 했던 미국통이 필요해서였다.
이에 앞서 총선거 직전 이승만 박사의 지시로 여걸 임영신은 단정 정부수립의 사명을 띠고 미국의 여러 기관과 단체를 찾아다니면서 활약하고 다녔다. 또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이승만 박사를 도운 임영신과 이승만 박사와의 로맨스는 유명할 정도로 이승만 박사는 임영신을 무척 총애했다.
한편, 이승만 박사는 국무총리에 이윤영을 임명했다. 이때까지 이윤영은 정계는 물론 일반국민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윤영은 평안도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만든 조선민주당 부당수였다. 이승만 박사는 통일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월남한 동포를 국무총리로 기용하면 남북을 망라한 정부수립이 실현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한민당에게 요직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을 보면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다. 결국 한민당은 이윤영의 국무총리 동의안을 부결시켜 국무총리가 되고자 했던 이윤영의 소망은 사라져버렸다.
곧이어 이승만 박사는 이범석 장군을 국무총리로 지명한다고 발표했다. 이승만 박사는 당시 잘 조직되고 훈련된 민족청년단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이범석의 존재가 몹시 우려되어 그를 직계 세력으로 끌어들일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이 이끌어온 민족청년단 세력을 통해 한민당 세력에게 제동을 걸고, 공산세력에 대결하도록 해서 적절하게 그를 이용하고 난 후, 그 세력을 없애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앞서 이윤영의 국무총리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것은 이승만 박사에게는 첫 시련이었다. 이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한민당 당수 김성수를 찾아가 협력을 요청하였으며, 비한민당 계열에서도 이범석 장군을 많이 지원하여 재석 197명 중 가에 110표, 부에 84표, 무효 3표로 비교적 순탄하게 총리인준을 받았다.
이리하여 청산리 전투의 명장 이범석 장군은 정식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초대내각에 대해 근위부대 형성, 미주파의 득세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불완전한 내각이라고도 비판했다. 이승만 박사는 건국초에 한 정당의 영향력을 받지 않으려 했고, 한 정당에 특혜와 특전을 주지 않으려 했다.
또 이승만 박사는 한민당에서 그를 실권없는 상징적 대통령으로 만들고 주도권을 장악해 내각책임제를 하려 한다면서 한민당을 몹시 경계하였다. 이승만 박사 계열은, 한민당이 제일의 공로를 세웠음을 스스로 지나치게 강조하고 정치복선이 심하며, 인물은 있으나 조화가 없다고 보았다.
한민당 반독재 투쟁
이승만 박사가 한민당 인사들을 배격하고 경원시 하자, 한민당에서는 이 박사를 원망하고 재인식하기 시작했으며, 필요없으면 내치는 기대할 게 없는 인물이라고 몹시 분노하고 서운해했다. 이때부터 한민당은 반독재투쟁의 선봉이 되어 제일야당의 험난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민당으로부터 시작하여 야당을 해온 인사들 중에서 때로는 오도된 정보로 인해, 때로는 당리당략에 따라, 때로는 사감으로, 때로는 편협된 생각으로, 때로는 오해로, 때로는 사리사욕에 따라 집권세력을 향해 반대를 한 일도 많았다.
그러나 유독 낭산은 야당생활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이승만 박사가 잘하는 일은 적극 지원하고, 또 잘하도록 항상 직언했다.
이승만 박사는 국무회의 소집에 앞서 부정과 당파 파쟁이 없도록 모두들 화합해서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데 진력해나가도록 당부했다. 이어 이 박사는 첫 각의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편견없이 공평무사하게 일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먼저 질서를 확립하고 기강을 세워 상하일치 단결하여, 나라와 겨레에서 사심없이 봉사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국무회의는 거의 다 이승만 박사가 주재하였으며, 먼저 이 대통령이 문제별로 시달하고 국무총리와 장관이 의견을 개진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의견제시보다도 주로 대통령의 얘기를 경청하는 것이 중시되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