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년 때 월출산에 부모 몰래 내다버리기도
가뭄에 남의 논 물 빼가는 ‘물 도둑’도 생겨

 

월출산의 용치골 물을 한 방울이라도 논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바위를 뚫어 만든 용수로의 모습.
하늘에는 솔개, 독수리들이 날고 멀리 덕진만에서는 부엉이들이 고기를 낚아채 갖고 와서 마을 뒷산 바위틈에 까놓은 새끼들에게 찢어 먹이는 모습을 마을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었다. 솔개와 독수리가 날고 있을 때는 집집마다 닭을 가두고 닭을 채가지 못 하도록 망을 보느라 법석을 떨기도 하였다.


그런데 벼농사는 예나 지금이나 물이 없이는 지을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이 벼농사를 지었을 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만 의존하는 천수답뿐이었다. 따라서 벼의 성장에 맞추어 적기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들고 가물면 농사를 망치는 흉년이었다. 흉년이 들면 처자식은 물론 부모님까지도 굶어야 했다. 못 먹으면 몸이 허약해져 병들어 죽거나 병든 곳이 없더라도 그대로 굶어 죽어야 했다.


젊은 세대들은 옛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아 믿어지지 않겠지만 50년 전,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굶어서 몸이 부어 죽은 사람들이 마을마다 상당수에 달했다. 이 무렵,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은 그래서 나온 말이다. 박정희 정권이 5·16 군사혁명을 일으킨 첫 번째 이유가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밥이 부족하면 조용히 굶는 사람은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였다. 외신 뉴스에서 보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불쌍한 모습처럼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도 처절한 생활을 했던 것이다. 굶주리고 있을 부엌의 아내를 위해 일부러 배 아픈 척 밥을 남겨 두었다는 옛 이야기를 보릿고개 세대들은 알고 있다.


집에 남아 있는 식량은 날로 줄어든 채 하루는 저물고 또 새 아침은 밝아왔다. 식량이 모두 바닥날 때까지 끝까지 남아 있어야 할 식구는 누구이고, 식구 수를 줄여야 할 절박한 상황에서 먼저 죽어줘야 할 식구는 누구였을까? 이래서 노동력을 상실한 늙으신 부모님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미로의 깊은 월출산 산중으로 내다버린 고려장의 풍습이 우리 영암에도 생겨났던 것이다. 자식이 강제로 버린 것이 아니라 “나는 살만치 살았으니…”라며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을 통감하고 늙으신 부모님이 버림받을 것을 간청했을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끈끈한 가족의 정까지도 짓밟아 버린 굶주림에 대한 고통과 공포. 누가 실감나게 그 정황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농사꾼들은 월출산 골짜기의 물까지도 논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농수로를 확보하는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도 산골짜기의 바위를 깨고 땅을 파서 만들어 놓은 농수로가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회문리(회의촌)의 용치골 물을 논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농수로도 그 중의 하나다. 이곳의 수로를 유심히 살펴보면, 월출산 골짜기의 물을 단 한 방울이라도 벼농사에 이용하려고 애쓴 조상들의 흔적이 엿보여 숙연함이 느껴진다. 생명 유지의 원천은 식량이었고 식량을 생산하는 일은 농업이었으므로 농업이야 말로 생명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오랜 농경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농산물의 생산량 증감이 해, 달, 바람, 비구름 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터득하였다. 그리고 이런 자연현상의 배후에는 초자연적인 어떤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추수한 곡식을 자신들의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자연 현상의 배후에 있는 초자연적인 힘, 즉 하느님과 조상신이라고 믿으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면 하느님과 조상신에 감사드리는 추석명절에 정성들여 음식을 장만해서 차례를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영산강 하구언이 완성되어 영산호 물이 논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영암읍 어느 마을에서나 농사철이 되면 물을 대는 일이 가장 큰 일과였다. 물대기는 골짜기의 물이 내려오는 순서대로 윗 논부터 차례대로 대는 것이 원칙이었다. 윗 논에 물이 다 차면 다음 논이 물대는 차례였다. 그런데 먼저 물대고 싶은 욕심에 아랫 논 사람이 윗 논 사람의 물고(꼬)를 막고 자신의 논에 먼저 물을 댈 때는 물싸움이 벌어졌다. 억지를 쓰는 사람들은 어느 마을에나 한두 명씩 있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또 남의 논둑을 잘라서 물을 빼가는 물 도둑도 있었다. 논의 위치가 비슷해서 함께 물을 댈 때는 각자의 물꼬에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가도록 물꼬의 크기를 조절해 놓고 밤새도록 서로 감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모기에 물리면서 밤이 새도록 물을 대다 보면, 어느 사이 거머리는 배가 불룩하도록 피를 빨아 먹은 채 다리에 붙어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처럼 물 문제야 말로 옛 사람들이 농사짓는데 가장 골칫거리였다.  /영암신문 명예기자단 자문위원=조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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