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 내용은 익명의 독자가 본사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퍼온 것입니다.
다음의 글은 그 곳에 올린 ``도갑사``에 얽힌 짧은 전설 하나를 소개했던 것인데 짧지만 짧지 않은 엄청난 사실이 숨겨져 있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월출산 도갑사(道甲寺)는 현재는 아주 쇄락하여 대웅전 하나만 덩그렇게 남아있지만 풍수지리의 원조인 도선국사의 고향답게 국보50호인 解脫門과 더불어 마애여래좌상이 증명하듯 엄청나게 큰 巨刹이었다고 한다.
도갑사를 창건할 당시의 이야기인데 절을 짓기 위하여 전국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베어져왔다. 그런데 당시 이 절의 건축 책임을 맡고 있던 도편수가 측량을 잘못해서 모든 서까래의 길이를 실제 필요한 칫수보다 턱없이 모자라게 잘라 버렸다고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도편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고 있는데 보다 못한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그 연유를 묻자 아녀자가 알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다가 며느리의 끈질긴 청을 이기지 못하고 그 사연을 털어놓게 되는데 며느리 왈 ¨아버님, 참 딱도 하십니다. 잘려진 짧은 서까래 위에 다른 서까래를 한겹 덧붙이면 지붕의 곡선도 살아나고 더욱 멋진 건축이 되지 않겠습니까?¨
손바닥을 치고 일어난 시아버지가 그대로 실행했는데 그 뒤로 이 도갑사로 인하여 생겨난 이 아름다운 건축 양식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퍼져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건축양식을 우리는 ``부연``이라고 부르는데 덧붙인 서까래라 하여 붙일 부(附)자 서까래 연(椽)자 附椽이라고도 하고, 며느리의 아이디어로 생긴 서까래라 하여 며느리 부(婦)자 婦椽이라고도 한다.
나는 附椽이라는 사실적인 표현 보다는 전설의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 婦椽이라는 멋있는 단어를 더 좋아한다. 이것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한낱 필부에 불과하셨던 나의 외조부님으로 들을 정도라면 영암의 어떤 문헌속에 기록되어 있을 법한데 그 뒤로 어떤 글에서도 이 전설이 인용되는 것을 보지 못해 이제는 거의 체념 상태가 되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나만이 알고 있는 내가 자작한 전설이려니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남도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에게도 이 사실을 알린 바 있지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는지 그의 다음 글에서도 보지를 못했다. 내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문화유산답사라하면서도 대개는 인물 탐구에 그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문명에서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와도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일축해 버릴지 모르지만 초가집에서도, 사찰에서도, 궁궐에서도 응용되는 이 부연(婦椽)이라고 하는 건축양식은 건축사적으로 보나 미술사적, 문화사적으로 볼 때 혁명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나의 이 간단한 이야기는 한 개의 미미한 사료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영암신문이라면 좀 더 심도있는 자료의 발굴과 계몽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영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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