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200]
■ 구림마을(110)
신흥동 마을의 다층적 정체성
군서면 서구림리 신흥동 마을은 단순한 농촌 공동체를 넘어, 조선 중기 사림(士林) 문화의 본산이었으며, 고대 해양 신앙 유적의 보존지였고, 한반도 남서부의 지리적 대변동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독특한 역사 지리적 공간이다. 신흥동은 서구림 서호정마을 서쪽에 위치하며, 과거 영산강 하구와 연결되었던 상대포(上臺浦)의 길목에 자리하여 내륙의 유교 전통과 해양 활동이 교차하는 지리적 특성을 지닌다.
신흥동의 역사는 세 가지 핵심축을 중심으로 조명해볼 수 있다. 첫째, 태호 조행립(曺行立)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지역민들이 문중을 초월하여 합심하여 건립했던 사우, 즉 ‘아랫사우’의 원 창건지로서 신흥동이 지닌 사림 공동체적 역할이다. 둘째, 정원명석비(貞元銘石碑)의 재해석과 보존을 통해 드러나는 신흥동의 문화재적 가치이다. 셋째, 국제 무역항 상대포에서 대규모 간척 농장인 학파농장(學波農場)으로 변모한 극적인 지리적 변천사이다.
아랫사우(태호사·서호사)의 역사적 역할
먼저, 태호 조행립(兌湖 曺行立)과 태호사(兌湖祠)의 창건 배경을 살펴보자면,신흥동 마을의 사림 문화적 위상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태호 조행립(1580~1663)을 배향하는 사우(祠宇)의 설립에서 비롯된다. 조행립은 임진왜란 이후 격변하던 조선 사회에서 영암 사림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이 사우는 원래 군서면 서구림리 신흥동에 조행립의 호를 따서 ‘태호사(兌湖祠)’라는 명칭으로 창건되었으며, 이것이 지역에서 일컬어지던 '아랫사우'의 원형이다. 태호사의 건립은 특정 문중을 초월하여 구림 지역민들이 조행립 선생의 공덕을 기리고자 힘을 합쳐 추진한 공동체적 노력의 결과였다.
사우는 창건 이후 몇 차례의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1677년(숙종 3년)에 서호사(西湖祠)로 개칭되었으며, 일부 문헌, 예를 들어 『문헌비고(文獻備考)』나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구림사(鳩林祠)’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우의 명칭이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신흥동은 초기 창건지로서 지역 유교 문화의 중심 거점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사우의 명칭 변경과 기록의 다양성은 태호사가 인근 지역 사림들에게 매우 중요한 기관이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국에 널리 퍼져있던 사우와 서원은 중앙 정치의 풍파를 피할 수 없었다. 서호사 역시 1868년 흥선 대원군의 강력한 서원 훼철령(書院 毁撤令)에 따라 강제로 훼철되었다.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복원되지 못하다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을 맞이한 1946년에 비로소 군서면 서구림리 남송정마을로 이건(移建)되어 복원되었다. 태호사의 이건은 신흥동 마을의 역사적 위상에 물리적인 변동을 가져왔다. 사우가 원래 신흥동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이 마을이 단순한 지리적 공간을 넘어 17세기 후반 영암지역 사림 공동체의 정신적, 문화적 본산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사우의 건립은 해당 지역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학맥의 구심점을 선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1946년 남송정으로의 이건은 신흥동이 상징적으로 지니던 '아랫사우의 원 창건지'라는 물리적 위상이 다른 마을로 이전되었음을 의미하며, 현재 신흥동은 그 유적의 원형지로서만 남아 역사적 중요성을 간직하고 있다.
'아랫사우'와 '윗사우'의 문화적 지형
신흥동의 '아랫사우'(태호사·서호사)와 대비되는 존재로 지역에서는 '윗사우'라 불리는 죽정서원(竹亭書院)이 있다. 죽정서원은 1681년(숙종 7년) 고을 선비들이 오한(悟漢) 박성건 선생을 모시기 위해 도갑리 음죽정(陰竹亭)에 창건한 사당인 죽정사에서 비롯되었다. 오한 박성건은 함양 박씨의 영암 입향조이다. 이후 박권, 박규정, 이만성, 박승원 등 네 분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죽정서원은 함양 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죽정서원 역시 서호사와 마찬가지로 1868년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1961년에 복원되었다. 죽정서원의 복원 과정에서 박승원의 아들 박성오(朴省吾)의 영정을 모신 조양재 영당(朝陽齋影堂)이 함께 건립되는 등 함양 박씨 문중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두 사우 체제(二祠宇體制)의 지리적 배치 및 함의
서호사(신흥동 원위치)가 1677년에 개칭된 직후인 1681년에 죽정서원이 창건되었다는 사실은 이들 양 기관이 시기적으로 매우 근접하게 설립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들 사우는 지리적으로 월출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암지역 사림 세력을 양분하는 축을 형성했다. 지역에서 통용되던 '아랫사우'와 '윗사우'라는 명칭은 이들이 지리적 고저(신흥동은 상대적으로 낮고, 도갑리는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를 기준으로 대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두 사우의 건립은, 함양 박씨 문중을 중심으로 오한 박성건 선생의 유산을 기리고자 하는 유림집단(죽정서원)과 태호 조행립 선생의 공덕을 기리고자 하는 지역 공동체(태호사)라는 각기 다른 배경과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 지역 문화적 움직임의 상징이다.
두 주요 사우가 같은 시기에 건립되고 1868년 흥선 대원군 시대에 동시에 훼철된 후, 20세기 중반 유사한 시기에 복원되는 역사를 공유한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신흥동을 포함한 구림지역 전체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지역 사림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신흥동은 이 구조에서 조행립 선생을 기리는 지역민 중심의 사우 연원지 역할을 담당하였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