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99]
■ 구림마을(109)
간척 이전에는 서호(西湖)의 바위섬
백의암은 현재 육지화된 들판 한가운데에 있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배경을 가진다. 간척사업이 조성되기 전까지 백의암은 갯벌 위에 솟아 있던 '작은 바위섬'이었다. 백의암이 실제로 바다 가운데의 바위섬이었다는 사실은 도선국사가 '배를 타고 떠났다'는 전설의 지리적 배경을 강하게 뒷받침 한다. 이는 설화의 발생 시기가 영암지역이 해상 교통로로 기능했던 고대 또는 중세 전기였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며, 만약 이 설화가 간척 후 육지화된 이후에 인위적으로 조작되었다면 '배를 타고 떠났다'는 모티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백의암과 도선국사 전설의 상징성
'백의암(白衣岩)'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조선 중기 이후로 추정되며, '흰옷 바위'라는 뜻으로 도선국사가 걸쳐두고 떠난 흰옷(백의)에서 유래했다. 이 바위는 원래 바위의 색깔과 형태에 따라 '백암(白巖)'이나 '백석(白石)'으로 불렸으며, 군서면 모정마을 원풍정(願豊亭) 12경 중 하나인 '서호백석(西湖白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는 배를 타고 당나라로 떠날 때 물 위에 솟아 있는 이 바위 위에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걸쳐 놓은 뒤 "이 바위가 검은색을 띠면 내가 죽은 것이고, 흰색을 띄고 있으면 살아있는 것으로 알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이 바위가 흰 색깔을 띠고 있어 주민들은 이를 '흰덕바우'라고도 부른다. 바위의 색깔이 영원히 희다는 점은 도선국사의 정신적 영속성 또는 불멸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해석된다.
도선국사 생애와 구림마을 연관성
도선국사는 통일신라 말기(9세기)에 활동한 승려로,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 지역(구림)이 그의 탄생지라는 전승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그는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활동하며 고려 태조 왕건의 집터를 바로잡아준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 국가 문헌에서부터 그 위상이 공적으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했다.
도선국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시기는 통일신라 말로, 신라의 해상 활동과 구법(求法) 활동이 활발하던 시대였다. 백의암 전설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떠났다는 대목은 개인의 구도 행위를 넘어, 당시 신라 지식인들이 국제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바다를 건너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문화적 표상으로 기능한다. 그의 유학 행위는 지역적 명성(구림)을 국제적 권위로 전환하는 서사적 장치였으며, 백의암은 이 출항의 상징적 증거물이다.
백의암 중심의 도선국사 유적군(群)
백의암은 도선국사의 생애와 관련된 구림마을의 여러 유적들, 즉 '도선국사 유적군'의 종착점 역할을 한다. 이 유적군은 도선의 탄생부터 출가까지의 전 과정을 공간적 연속성 속에 담고 있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적이 있다.
최씨원(崔氏園)=도선국사의 탄생지로 전해진다. 집터에는 '고최씨원 금조가장(古崔氏園 今曺家庄, 옛날에는 최씨 정원, 이제는 조씨 정원)'이라 새겨진 명문 바위가 남아있다.
조암(槽岩)=도선국사의 어머니(최씨 처녀)가 이곳에서 빨래하다가 물에 떠내려온 오이를 먹고 도선을 잉태했다는 탄생 설화가 깃든 '구유바위'이다.
국사암(國師巖)=도선 어머니 최씨 처녀가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고 아기를 버린 바위로, 이 반석의 이름이 국사암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비죽(飛竹)=국사암에 버려진 아기 도선을 보호하기 위해 비둘기 떼가 날아간 출발 지점이다. 이 비둘기 떼 전설이 바로 구림(鳩林)이라는 지명 유래의 근원이 된다. 모정리 고분군 유물이 발견된 지역이 바로 비죽이다.
백의암(白衣岩)=비죽에서 국사암으로 가는 중간지점 정도에 위치하며, 도선국사가 당나라 유학을 위해 배를 타고 떠나기 전 옷을 걸어두고 자신의 생사를 예언한 바위이다.
백의암에 관한 전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백의암은 작은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현재는 주변이 농지가 되었으며, 도선국사의 전설이 서려 있다. 전설의 내용은 중국의 황제가 묘자리를 잡으려고 하자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동국진인 낭산(朗山) 도선(道詵)을 찾아서 묘자리를 잡으라고 하였다. 황제의 명을 받은 사신들이 배를 영암 덕진포에 대고 수륙재(水陸齋) 모임이 있는 월남사(月南寺)를 찾아가 보니 신령하고 범인(凡人)과 다른 도안(道眼)이 뛰어난 도선을 만나게 되었다. 사신들은 도선에게 뜻을 전하고 함께 가기를 권유하여 아시천(阿是川)에서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도선이 바위에 옷을 벗어 던지며 말하기를 ‘만약 내가 살아 있으면 이 바위가 하얗게 있을 것이고 내가 죽으면 검은색으로 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이 바위는 하얀색을 유지하고 있어 백의암(白衣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의암 전설은 도선국사의 출가와 이별을 다루지만, 그 이면에는 '복귀의 예언'을 담고 있다. 바위에 걸어둔 흰옷이 흰색을 유지하는 한, 도선국사는 영적으로 고향에 남아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편으로는 지역 주민들의 도선에 대한 기대와 추앙이 낳은 기대심리가 이러한 전설로 남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도선 탄생 설화
구림 지역 도선국사 설화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데는 조선 초기에 국가 차원에서 편찬된 지리지 기록이 결정적이다. 이 문헌들은 도선국사의 탄생지 전승이 최소 15세기부터 확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입증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편찬)와 『동국여지승람』(15세기 말)은 도선국사의 탄생지인 '최씨원'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백의암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최씨원에서 시작되어 비죽, 국사암을 거쳐 백의암으로 이어지는 도선국사 유적군의 중심성이 이미 조선 초기 국가 기록에 의해 공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백의암 관련 설화가 최소 조선 초기 이전부터 구림 지역의 핵심적인 구전 전승이었음을 의미한다.
낭호신사, 도선은 구림의 중심인물
18세기 구림마을 선비 구계 박이화(朴履和, 1739~1783)가 지은 가사 『낭호신사(浪湖新詞)』는 구림 지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이 문헌은 구림 열두 마을의 역사적 유래와 주요 인물을 다루면서 도선국사를 마을의 품격을 높이는 중심인물로 강조한다. 박이화는 구림의 정체성을 오직 도선국사에 기반하여 확립하고자 했다. 이는 근현대의 다른 인물 현창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구림 지역의 지식인층이 지역 정체성을 불교-풍수학적 거두(도선)를 통해 확립하려 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