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관묘와 토광묘가 병존하는 모정리 고분군(茅亭里 古墳群)
- 고대 마한사회의 전통적 요소와 초기 외래 요소가 결합된 유적

모정리 고분군(茅亭里 古墳群)이 발견된 장소. 서구림리 신흥동의 ‘비석거리’에서 모정리로 가는 비탈진 도로를 따라 약 300m 정도 올라가면 좌측에 조상현씨의 집이 있다. 유적은 바로 조 씨의 집 위쪽 저평한 구릉과 도로 우측의 구릉에 있다. 서쪽으로 은적산이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 매향암각명이 있는 철암산 치마바위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모정리 고분군(茅亭里 古墳群)이 발견된 장소. 서구림리 신흥동의 ‘비석거리’에서 모정리로 가는 비탈진 도로를 따라 약 300m 정도 올라가면 좌측에 조상현씨의 집이 있다. 유적은 바로 조 씨의 집 위쪽 저평한 구릉과 도로 우측의 구릉에 있다. 서쪽으로 은적산이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 매향암각명이 있는 철암산 치마바위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모정리 고분군 유적은 모정마을 ‘비죽골’과 ‘방축골’로 불리는 나지막한 구릉지대에서 농경지로 개간되는 과정 중 구릉의 일부가 삭평(削平)되면서 파괴되었고, 이때 다량의 옹관 조각과 회청색 경질 토기 조각이 노출되었다. 이는 분구(墳丘, 봉분)의 흔적이 지표상에 명확히 남아 있지 않거나, 원래 분구의 규모가 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조상현 가옥은 서구림리 720번지(백암동 마을)에 해당하지만, 실제 옹관 조각이 수습된 지점은 모정리에 해당한다.

제대로 된 발굴 조사 이뤄지지 않아
모정리 고분군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지표상에 드러난 유물을 통해 고분의 존재 가능성이 높은 지점으로 확인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원래 이곳은 현재의 도로보다 더 높은 지형이었다. 동쪽으로 월출산과 지남들녘이 자리하고, 서쪽으로는 서호강 몽해들과 은적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다. 그런데 십수 년 전에 밭이었던 이곳을 장비를 동원하여 다량의 흙을 파내고 논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고대 고분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었다.

“모정리 고분군은 지남평야와 경계가 되는 지점인데 경지 정리로 구릉이 깎이면서 옹관 고분이 파괴된 채 옹관 조각이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분구(墳丘 봉분)의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주변에서 다량의 옹관 조각과 회청색 경질 토기 조각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옹관 고분으로 추정된다. 기존 조사에서는 완형 토기만이 보고되어 움무덤(土壙墓)이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움무덤과 독무덤(甕棺墓)이 병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집 위쪽 구릉에서는 완형 토기 여러 점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그중 4점을 조상현이 보관하고 있는데 둥근 바닥 단지(圓底壺) 3점, 두 귀 항아리(兩耳附壺) 1점이다. 또 도로 건너편 깎여 나간 구릉에는 옹관 조각들이 다량으로 노출되어 있다.” <출처:디지털 영암문화대전>

저평(低平) 구릉과 고대 취락(구림마을)의 연관성
모정리 고분군은 영암의 핵심적인 농경 평야인 지남평야(指南平野)와 경계를 이루는 나지막하고 저평한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입지 조건은 후대 영암 지역의 지배층이 선택한 시종 고분군이나 금지리 고분처럼 주변을 조망하는 높은 독립 구릉의 정상부에 고총을 조성하는 방식과는 대조적이다.

모정리 고분군이 저평한 구릉에 위치하고, 인근에 월출산 서쪽 자락에 자리 잡아 2,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취락지인 구림마을이 존재한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모정리 고분군이 단순히 독립된 묘역이 아니라, 고대 영암 지역의 가장 오래되고 안정적인 핵심 취락지(구림마을)의 구성원들, 즉 초기 토착 수장층이나 일반 공동체의 묘역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대규모 고총이 등장하기 이전, 지역 기반의 사회 구조와 인접하여 형성된 묘역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극대화된다.

영암의 지정학적 위상과 초기 토착 세력의 엘리트 문화
영암지역, 특히 군서면 인근 시종면 일대는 지리적으로 서해와 내륙을 잇는 교통 요충지로서, 선진 문물을 해양 교통로를 통해 받아들이고 이를 내륙으로 확산시키는 관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지정학적 이점을 바탕으로, 이 지역 토착 세력은 신라와 백제의 중앙 세력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정리 고분군은 이러한 독자적인 토착 세력이 문화적 기반을 형성하는 초기 단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후대 시종 고분군에서 금동관 세움 장식이나 원통형 토기 등 신라, 백제, 가야, 중국, 왜의 요소가 융합된 복합적인 문화 양상이 나타나는 것과 비교할 때, 모정리에서 발견된 유물은 주로 토착적인 옹관묘 전통과 초기 외래계 토기 기술의 유입을 보여줘 영암지역 지배층의 문화가 복잡하게 융합되기 시작하는 시점의 근간을 파악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구릉지대 소규모 유적의 발굴과 보존 필요
모정리 고분군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유구의 전체적인 형태는 미상이다.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지 정리로 인해 구릉이 깎여 나가면서 봉분의 흔적이 지표상에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유적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옹관 조각이 다량으로 노출되었다는 사실은, 이 유적이 단순한 평지 토광묘나 옹관묘가 아니라, 흙을 쌓아 만든 분구 내에 매장 시설을 안치했던 분구묘(墳丘墓)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러한 훼손은 유적의 보존 상태가 매우 취약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유적의 중요성을 깨닫고 보존하기 위한 정책적 조치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훼손 상태는 영암 지역의 저평 구릉 유적들이 농경 활동에 의해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유적의 즉각적인 보존 조치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옹관묘와 토광묘의 병존
모정리 고분군에서는 주변에서 다량의 옹관 조각이 수습되는 점을 통해 옹관 고분으로 강력히 추정된다. 옹관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장례 문화이며, 4세기경 고분문화로 정착된 이 지역의 독창적인 묘제이다.

특이한 점은 기존 조사에서 완형 토기만이 보고된 일부 지점을 움무덤(土壙墓, 토광묘)으로 추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는 모정리 고분군이 옹관묘와 토광묘가 병존하는 복합적인 묘역이었을 가능성을 높인다. 모정리 고분군에서 옹관묘와 토광묘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의 장례 문화가 토착 전통과 외래 요소의 유입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되는 과도기적 특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완형 토기 유물은 지역 전통의 반영
모정리 고분군 일대에서 수습되었다고 전해지는 완형 토기 중, 현재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4점은 둥근 바닥 단지(圓底壺) 3점과 두 귀 항아리(兩耳附壺) 1점이다. 둥근 바닥 단지는 영산강유역 토착 세력의 전통 토기 양식의 전형적인 형태로, 주로 4세기대에 사용되었던 기종이다. 두 귀 항아리 역시 이 지역 토기 연구의 중요한 형식이며, 이들 유물은 모정리 고분군 또한 이러한 전통에 기반한 묘역이었음을 확증한다.

이러한 유물들이 전문 기관에 의해 체계적으로 목록화되거나 분석되지 못하고 개인이 보관되고 있다는 점은 해당 유적 연구에 있어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유물 보존 상태 및 제작 기법에 대한 정밀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모정리 고분군의 정확한 조성 시기와 문화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이다.

전통적 요소와 초기 외래 요소가 결합된 유적
모정리 고분군에서 다량 수습된 유물 중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회청색 경질 토기 조각이다. 경질 토기(Hard-Fired Pottery)는 무기물 함량이 높고 비교적 고온에서 소성된 토기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걸쳐 신라나 백제 또는 가야 지역의 기술적 영향을 받아 제작되거나 유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전통적인 옹관묘 문화에서 회청색 경질 토기가 함께 발견된다는 점은 모정리 고분군의 연대론적 위치를 확립하는 데 핵심적인 지표가 된다. 이는 모정리 고분군이 점차 삼국시대 중앙 문화의 기술 및 형식적 영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 사이에 조성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처럼 전통적 요소와 초기 외래 요소가 결합된 유적은 5세기 중·후기의 거대한 석곽·석실묘와 외래계 유물이 융합된 시종 고분군으로 발전하기 직전의 영암 지역 마한 사회 변천사를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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