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바람이 서늘해졌다. 밤잠을 설치게 하던 열대야가 이렇게 지나고 새벽 찬 기운에 이른 아침을 일으키곤 한다. 그렇지만 해만 오르면 다시 따가워지기 시작한다. 절기는 진즉 가을을 알렸는데도, 한낮 열기는 여전히 여름이다. 음력 6월 공달이 든 때문이고, 기후변화로 인해 갈수록 심해질 거라고도 한다. 자연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순 없다지만 이겨낼 수는 있다. 땀을 더 흘리면 된다.
진안 마이산으로 간다. 남부주차장 앞으로 금당(金堂)사 일주(一柱)문이 높이 들어온다. 노출 콘크리트 기단이 최근 재건되었음을 말하지만, 실은 1,400여 년 사연이 담긴 고찰이다, 열반종찰 천일기도 입재(入齋)와 불사(佛事)가 한창인 그곳을 앞에 두고 좌측 고금당(古金堂)으로 들어선다. 작은 숲길을 지나니, 서 있기도 힘든 가파른 바위 위에 황금빛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고려말 나옹선사(1320~1376)의 수도처인 토굴, 나옹암(懶翁庵)이다. 뒤뜰로 들어서니 ‘어디서 오셨어요?’ 소지(掃地) 스님들의 안부 인사가 정겹게 들려온다. 잠시 답례 후, 얼마를 걸었을까? 멀리 들어오는 봉우리가 아직은 두 개가 아닌 하나로 겹쳐 보인다. 갈 길이 멀다. 해발 527m 나봉암 표석을 뒤로, 우뚝 솟은 비룡대에 오르니 사방이 트여온다.
마이산은 말귀를 닮은 두 봉과 탑사로 이름난 곳이다. 둥그런 암마이봉, 뾰족한 수마이봉, 그 수직 암벽 안으로 아스라한 사찰과 탑들이 신비감을 더하며 전북 도립공원, 국가지질공원, 산림청 100대 명산, 대한민국 명승이 되었다. 그 명품 햇살과 솔숲을 더하여 가니, 옛 갈림길 나무 아래로 돌무지가 쌓인 성황당이 나타난다. 작은 소망을 기원한 후 오르락내리락 암마이봉으로 간다.
돌계단이 이어진다. 깎아지른 덩어리를 끼고 돌며 정상으로 오르는 초입을 찾아간다. 그런데 행여 무너질까? 군데군데 굵은 나뭇가지를 바쳐놨다. 모래와 진흙 사이로 촘촘히 박힌 크고 작은 돌들이 부스러지고 패이며, 마치 부식된 콘크리트처럼 불안하게 보인다는 이유지만, 세계적인 볼거리인 타포니(tafone) 풍화혈이다. 암벽 위의 벌집 같고, 수선루(睡仙樓)가 들어갈 만큼 커다랗게 파이기도 했다.
1억여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호수에서 융기한 역암층이 동결융해를 반복한 결과다. 꼭대기까진 450m를 더 가야 한다. 70%가 넘는 경사지만, 천상으로 가는 듯한 철계단과 디딤 받침이 어렵지 않게 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 태산가를 부르다가,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며 아껴둔 물을 거푸 하다 보니, 해발 687.4m 암마이봉 표석이 나타난다. 만상이 스치는 찰나의 순간이다.
절벽을 타고 오르는 바람이 상쾌하다. 해발 681.1m 수마이봉은 갈 수가 없다. 더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존중하는 하행 길 위로 참나무 이파리 가지가 많이 떨어졌다. 엊그제 바람 탓일까? 의문은 금세 풀렸다. 도토리거위벌레가 범인이다. 여린 알에지 알을 낳은 후, 날카로운 톱니로 잘라 떨어트린 것이다. 영양을 섭취한 애벌레가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을 나게 하려는 지혜다.
암마이봉 골짜기 안으로 탑(塔)사가 깊이 자리했다. 1885년부터 이갑룡(1860~1957) 처사가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은 탑이 시초였다. 30여 년 동안 용화(龍華)세계 실현과 창생(蒼生)을 구하기 위해 팔진도법, 음양이치법, 기공법을 이용하여 108개를 쌓았단다. 낮에는 나르고 밤이면 하나씩 올린 정성이 100여 년 비바람과 전란까지 피하게 했을까? 1.0~13.5m 높이 80여 개가 현존하고 있다.
천지탑, 오방탑, 일광탑, 월광탑 등 유불선의 뜻을 담았다. 해를 더하며 그 정성과 결실에 치성(致誠)들인 사람이 늘면서, 삼신상과 불상까지 모시게 됐다. 1976년 전북도기념물 지정, 1979년 태고종단 등록, 1986년엔 대웅전과 산신각이 들어섰다. 마치 예수 사후에 복음서와 서신이 쓰이며 그리스도교회가 태동한 것과 닮았다.
탑사는 오늘날 각종 다큐와 드라마 촬영지, 국내 최대 능소화와 사월 벚꽃, 겨울이면 출현하는 역고드름으로 유명하다. 영하의 밤마다 골을 도는 바람이 정안수를 감아올리며 육각수 구멍을 얼린 것이다. 마이산은 철마다 돛대봉, 용각봉, 마이봉, 문필봉으로 달리 불릴 만큼 각양각색을 자랑한다. 천연기념물 줄사철나무와 청실배나무 또한 볼거리지만 아는 채를 못 했다. 사전에 공부가 덜 된 탓이다.
출발지가 가까워지며 가게가 이어진다. 그 사이로 칡즙과 벌나무즙 시음장이 보인다. 벌나무? 간질환과 백혈병에 좋다는 단풍나무과 교목이다. 특히 유효성분이 많은 껍질을 달여 마시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독성은 없지만 신장이 허하면 무리가 갈 수 있고, 수분이 많이 빠져나가면서 변비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정보다. 오늘만 한 박스에 50%, 2만 오천 원이다. 내일도 오늘 아닐까? 상술이 좋다.
마이산 한 바퀴, 뙤약볕 한나절이 다 간다. 늦은 점심은 초가정담에서 나물비빔밥 특식에 막걸리 한 상을 내게 했다. 줄줄 흘린 땀까지 보충하게 한다. 그래, 이 맛이지? 지쳐가던 달맞이와 봉선화가 제 색으로 피어나고, 금은화 인동초도 붉은 갈기를 펼치며 소생하던 날이다.
오늘을 또 보낸다. 다음 동행을 기약하는 하루, 일주일, 한 달이 다시 금방일 거다. 지금은 가을이다. 하늘엔 뭉게구름 높아가고 땅에선 귀뚜라미 장단 더해지는 나날이다. 곧 추석이라는 소리다. 기쁨과 사랑을 더하며 나누는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