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96]
■ 구림마을(106)

서구림리 신흥동 상대포 역사공원 입구에 세워진 정원명석비. 영암군은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1650년 70세가 된 태호 조행립은 이 석비의 정체가 매향비(埋香碑)임을 밝히는 시를 지어 문집에 남겼다. 후세인들이 이러한 문헌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소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소홀히 대접했던 것이다.
서구림리 신흥동 상대포 역사공원 입구에 세워진 정원명석비. 영암군은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1650년 70세가 된 태호 조행립은 이 석비의 정체가 매향비(埋香碑)임을 밝히는 시를 지어 문집에 남겼다. 후세인들이 이러한 문헌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소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소홀히 대접했던 것이다.

땅속에 묻힐 뻔한 정원명석비
2006년 발간된 책자인 「호남명촌 구림」에 ‘정원명석비’를 발견하게 된 구체적인 경위가 잘 묘사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부터 구림 사람들은 모정마을로 올라가는 언덕길 못미처 새원머리로 들어가는 갈림길을 ‘비석거리’라고 불러왔다. 이 비석거리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오래된 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임자 없는 이 비석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오랜 세월 동안 돌보지 않아 넘어져 흙 속에 묻혀 있었다.

1962년경 신흥동마을 사람들이 울력으로 도로 정비를 하던 중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도랑(실개천)에 다리를 놓을 때 버려진 비와 통나무를 상판(上板)으로 다리를 만들었다. 그 후 2~3년이 지난 1965년에 골목 정비 사업으로 면사무소에서 시멘트 토관을 배당받아 다리 상판을 교체하게 되었는데 이때 묻은 흙을 털어내고 씻어보니 묘비석이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해석할 수 없는 글이 음각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보통 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원히 땅에 묻히거나 없어질 뻔한 중요한 문화재가 빛을 보고 보존될 수 있었다. 결국 다시 세울 장소를 모색하다가 신흥동에 거주하는 최정호가 ‘우리집 터도 넓고 하니 우리 터에 우선 세워놓도록 하세’하는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 서구림 신흥동 458번지에 이 비가 세워진 연유이다.”
<출처: 호남명촌 구림, p. 211~212>

이 비석은 원래 신흥동에서 모정마을로 통하는 길목 아래 오랫동안 세워져 있었으며 그래서 그곳을 ‘비석거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구림마을에 거주했던 옛 지식인들은 이 비석의 정체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거라 짐작된다. 여러 가지 문헌을 살펴보던 중 태호 조행립의 문집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태호는 70세 때 구림마을 회사정에 올라 서호 풍경을 바라보다 흥에 겨워 7수의 시를 지었다. 그는 네 번째 수에서 석비의 정체가 매향비(埋香碑)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가 읊은 7수 중에서 첫 번째와 네 번째 수의 시를 소개한다.

흥취를 풀면서 읊다[遣興吟] 
쓸쓸한 바위 옆 서재에서 낮잠으로 혼미할제     
회사정 남쪽 이랑엔 풀 향기 솔솔나네     
서호에 내리는 비는 주룡강의 비와 닿아있고     
동악의 구름은 가학산의 구름과 이어졌네     
양쪽 언덕의 복숭아꽃은 조각조각 날리고     
한 개울의 흐르는 물은 빠르게 달려가네     
인생 칠십 세에 봄이 장차 저물려고 하니     
곧장 맑은 술 대하여 또 반쯤 취해 보세     
寥落巖齋午睡昏 社亭南畔草香薰
西湖雨接駐龍雨 東嶽雲連駕鶴雲
兩岸桃花飛片片 一溪流水去沄沄
人生七十春將暮 直對淸樽又半醺

향을 묻었다는 비석이 있는 곳 바로 서호인데     
그 앞엔 흰 돌이고 푸른 버들이 짝을 하네     초나라 키와 오나라 돛대 잇달아 정박해 있고     
모래톱에 갈매기와 물가 바위의 백로가 오가며 부르네     
연기와 안개 낀 외로운 섬에서는 고기 그물 거두고     
소나무 대나무가 무성한 큰 마을 술 팔기를 일삼네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와 이곳에 의지하니     
담담한 신세 즐기기에 충분하네     
埋香碑處是西湖 白石其前翠柳偶
楚柁吳檣連續泊 沙鷗磯鷺往來呼
烟霞孤島收漁網 松竹雄村事酒沽
解紱歸來依此地 淡然身世足歡娛
<출처: 태호집 p. 408~410>

허목(許穆, 1595~1682)의 월출산 유람기에 기록된 매향비
조선 후기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미수(眉叟) 허목은 월출산을 유람한 뒤 ‘월악기’라고 하는 기행문을 남겼다. 이 기행문 말미에도 매향비에 관한 표현이 들어 있다.

“구림에도 입석이 있고, 서호(西湖)의 석포(石浦)에도 입석이 있는데, ‘모년 모월에 향(香)을 묻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입석의 연월 글자는 마멸되어 볼 수 없었다.”

(鳩林又有立石 西湖石浦 又有立石 刻曰某年某月埋香 其年月字 漫滅不可見)
<출처:한국고전번역원,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1992>

이 기행문은 허목의 문집인 《기언(記言)》 제28권에 수록되어 있다. 허목은 1640년 9월에 영암 월출산을 유람한 뒤 구림마을에 들러 서호 석포에 있는 매향비를 살펴보고 기행문에 수록했다. 이것은 태호 조행립이 남긴 시보다 10년 앞선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이때도 비문이 거의 마멸되어 전문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호(西湖)의 석포(石浦)는 어디일까?
미수 허목의 기행문에서 ‘서호(西湖)의 석포(石浦)에도 입석이 있는데’라는 대목이 나온다. 서호(西湖)의 석포(石浦)는 구체적으로 어느 장소를 말하는 것일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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