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95]
■ 구림마을(105)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향비
‘정원명 석비’는 1990년 12월 5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로 지정된 이래, 그 정확한 성격과 가치에 대해 학계의 이견이 존재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금석문 판독 연구 성과를 통해 이 비석이 단순한 불교 관련 유물을 넘어, 통일신라 하대(下代)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피어난 민중의 집단적 염원과 신앙을 담은 한국 현존 최고(最古)의 매향비(埋香碑)임이 밝혀졌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은 비석이 지닌 역사적, 문화적, 미술사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석이 건립된 정원(貞元) 2년(786)은 신라 전제 왕권이 쇠퇴하고 중앙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매향이라는 민중 신앙이 단순히 종교적 행위를 넘어,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결속과 염원을 담은 사회적 행위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비석의 발견 
구림 ‘정원명 석비’는 1965년경, 한 주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당시 군서면 서구림리에 살던 최정호 씨는 자신의 집 근처 논에서 이 비석을 찾아냈으나, 오랜 세월의 풍화로 글씨가 심하게 마모되어 그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비석의 존재는 알려졌지만, 그 정체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본격적인 조사는 1987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영암군 문화공보실에 근무하던 박정웅 씨가 비석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비문에 새겨진 '정원(貞元)'이라는 연호를 확인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건립 연대가 통일신라 원성왕 2년(786)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비석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는 비문의 일부 내용만으로 불교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비문 전체의 판독과 해석에는 연구자들 간에 이견이 존재했다. 이 시기까지의 연구는 비석의 연대를 특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실질적인 용도와 의미를 규명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비문 판독과 금석학적 가치
‘정원명 석비’의 진정한 가치는 비문 판독을 통해 비로소 확립되었다.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오랫동안 그 내용을 알 수 없었으나 최첨단 기술과 면밀한 금석학적 분석을 통해 핵심 문구가 확인되었다. '향장(香藏)'과 '합향십속(合香十束)'이라는 명문이 바로 그것이다.   

매향비에 흔히 등장하는 '매(埋)'라는 글자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학계는 '향장'을 '향을 묻는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즉, 이 비석은 향나무 열 묶음을 모아(合香十束) 저평(渚坪 물가)에 묻는 행위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써 정원명 석비는 불분명한 '불교 관련 비'에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매향비'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이 발견은 단순한 유물 정체성 규명을 넘어 한국의 매향문화 연구의 기원을 8세기 통일신라 하대까지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학술적 성과이다.

정원명 석비의 내용
자연석을 약간 다듬은 돌기둥 모양으로 글씨는 전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28㎝, 너비 28㎝, 두께 27㎝이다. 사진과 탁본 자료에 따르면 4행 40여 자가 확인되지만 판독되지 않는 글자가 다수 있다. 집필자의 견해로는 다음과 같이 판독된다. 

①貞元二年丙寅五月十日渚坪外香藏內不忘 ②立□奇卅夫□□□□中 合香十束 ③入奇□人名力知 焉生 右 ④仁閂 

첫 번째 행의 내용은 ‘정원(貞元) 2년 5월 10일에 저평(渚坪) 바깥에 향을 묻고 잊지 않기 위해 (비석을 건립한다)’로 해석된다. 정원 2년은 786년이고, 저평은 물가의 땅을 의미한다. 물가 근처의 땅에 향을 묻은 것은 후대 자료에 다수 보이는 매향(埋香)과 관련된 것이다. 

매향은 후세에 올 부처님께 공양할 침향(沈香)을 만들기 위해 향나무를 바닷가 갯벌에 묻어 두는 것이다. 향나무를 갯벌에 백 년 이상 묻어 두면 고급 침향이 되기 때문에 미래에 공덕을 쌓기를 원하거나 미륵불의 탄강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매향을 행하였다. 비석이 발견된 곳은 근대에 매립된 곳으로 그 이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었다. 

둘째 행에 보이는 ‘합향십속(合香十束)’은 당시 땅에 묻은 향의 분량을 기록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모두(合) 열 다발(束)의 향(香)’이라고 해석된다. 

셋째와 넷째 행은 매향에 관여한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정형화된 양식을 벗어난 형태의 석비
‘정원명 석비’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비석은 별도의 가공이나 조각 없이 자연석을 약간만 다듬어 기둥 모양으로 만들었다. 비문에 새겨진 글씨는 전면에만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오랜 풍화 작용으로 인해 내용 파악이 극히 어려워 글자의 흔적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비석의 크기는 작지만 소박하고 실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 시대 중앙에서 제작된 일반적인 석비의 양식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당시 신라의 석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와 용 모양의 머릿돌인 이수(螭首)를 갖추는 것이 정형화된 양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으며, 이수는 용의 모습이 사실적이고 박진감 넘치게 조각되어 있다. 또한,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용머리형 귀부와 정교하고 장식적인 이수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정원명 석비에는 이러한 귀부와 이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정원명 석비가 중앙의 정형화된 양식을 따르지 않고 자연석이라는 소박한 형태를 취한 것은 이 비석의 건립 주체가 중앙 왕실이나 권위 있는 진골 귀족이 아닌, 지방의 독자적인 세력 또는 민간 공동체였음을 시사해준다. 이는 비석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중앙 권위에서 벗어난 민중의 삶과 염원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 할 수 있겠다.<계속>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