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고향에 고향역이 생겼다. 학산면 은곡리에 세워진 영암역이다. 한 많은 세월 동안 추억의 박물관인 고향역이 없었기에 영암에서는 기적도 목이 메어 울지 못했고, 초수동 범바위에 소원 빌었던 낭주골 처녀는 종착역 목포역에서 내려 용당리 나룻배로 건너오는 낭군을 기다려야 했다.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영암역에 코스모스가 피어나고 고향 열차가 도착하면 이쁜이도 곱분이도 마중 나와 반겨줄 것이다.
1899년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 구간이 개통된 이후 우리나라는 철도 역사 126년을 맞이하고 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이듬해 1906년에 경의선이 개통되다 1914년에 호남선이 개통되어 우리 고장에도 철마가 달리게 됐다. 일제 강점기 철마는 민족 수탈의 오명을 쓴 채 만남보다는 이별을, 환희보다는 눈물을, 반가움보다는 원수를 떠 올리게 했다. 영암 사람들은 당시 경성을 가려면 나룻배로 목포로 건너가거나 걷고 걸어서 영산포에 도착해 호남선 철마를 타야 했다.
50여 년 전, 나는 교직 첫 발령을 보성 벌교로 받고 남광주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수많은 간이역을 거쳐 벌교역에 도착해 황톳길 삼십 리를 걸어 장암에 있는 근무지로 갔다. 그때 철마는 숨이 차고 목이 메여 헐떡거렸다. 멈추는 가난한 역마다 무언가를 이고 진 수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르고 내렸다. 보따리 보따리는 기차 칸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푸성귀도 국거리도 쉴 새 없이 역에서 역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영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 철길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철길 가에는 하얀 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고향역이 세워진 목포 임성-보성 간 철도는 2005년 10월에 착공됐다. 당시만 하더라도 드디어 우리 영암에도 철길이 놓아 진다는 기대감으로 모두가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던 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연기되고 중단되다 수정되고 그러길 20년 세월이 흘러버리고 말았다. 금년 임성역에서 신보성역까지 공사가 완료되어 오는 9월 개통을 앞두고 있다. 여객과 화물의 운송이 가능한 전철로 완성된 것이다.
역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고향역이다. 나훈아 씨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던 노래이기에 심정적으로 그런 것일 것이다. 역하면 또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나 ‘비 내리는 호남선’, ‘대전 블루스’ 같은 노래가 떠오른다. 그래 기차역은 추억의 박물관이다. 일제 강점기 기차역이 수탈의 병참기지였다고 하더라도 내 고향 영암에는 수탈할 것마저도 없었는지 철길이 없었고 자연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실로 오랜만에 기차역이 생긴 것이다. 가슴이 뭉클해 얼마 전 아무도 없는 영암역을 찾았다. 은적산 자락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장소에 마치 절간처럼 그러나 월출산처럼 커다랗게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혹자는 예산 낭비라고 할지 모르지만 소외된 땅, 영암에 역이 세워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기차역에서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만난다. 만남과 이별 사랑과 눈물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기차역이다. 철마의 당김 질하는 바퀴 소리 속에서 식민지 수탈의 처절함과 한국전쟁의 귀청을 찢는 포화 소리, 피난민의 아우성까지 또 뜨거운 남녀상열지사가 들리는 듯하는 것은 126년 동안 기차역에 쌓여있는 회한 때문이리라.
비록, 우리의 철도가 일본 강점기 군사·정치적 목적에 의해 생겨났지만 육칠십 년대 산업화 시대에는 여객화물 수송에서의 지위는 확고했다. 오천 년 가난을 철마가 단숨에 달려 벗겨버린 것이다. 그 후 도로망이 정비되면서 퇴보하는 듯했지만 저운임, 신속, 대량수송의 장점이 되살아나면서 다시 발전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영암역은 언젠가는 놓일 제주 해저 열차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기에 변방의 영암을 세계 속의 영암으로 웅비하게 해 줄 것이다. 그 옛날 역에 역마가 있었듯이 오늘날 역에는 철마가 있다. 고향에 역이 생기니 그 이름이 고향역이다. 그 누가 이에 토를 달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