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이 일순간에 그려지는 걸 보면 일장춘몽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깊고 먼 터널의 끝처럼 아득하기도 하다. 철없던 시절부터 나는 애기어른이란 말을 들으며 자랐다. 온순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대견해서 붙여 준 별명이었겠지만 거기서부터 내 삶의 방향이 정해져 버렸다. 일곱 남매 중에 유일하게 부모님을 도와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또래들과 어울려 보지도 못하고 일만 했다.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에 매여 어른 흉내를 냈던 날들이 돌아보니 허망한 꿈이다. 습관이 운명이 된다는 말을 실감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에서 본 드넓은 초원의 카우보이가 멋있어 보여서 농촌으로 왔다는 무늬만 농군인 사람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님 병수발에 농사일에 집안의 장손 역할까지 착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들을 해내며 4남매의 아이들 기르던 시절도 지나고 보니 그냥 스쳐 간 꿈이다. 어지간한 큰일을 만나도 놀랍거나 당황스럽지 않은 건 그렇게 길러진 면역력 덕이라고 생각한다. 늘 잠이 모자라서 논둑에라도 앉기만 하면 꾸벅거리던 기억은 우습고도 서글프지만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였다. 시부모님도 못 이룬 꿈을 두고 떠난 애들 아빠도 추억으로 남은 지금, 그 모든 것들이 운명이었을 까라는 물음표가 남는다.
가난과 우환으로 늘 어두웠지만 학업에 충실하며 건강하게 커 준 아이들이 있어 견딜 수 있었던 날들이 새삼 소중하다. 죽을 만큼 아팠거나 하늘이 노랗도록 억울했던 일도 그냥 웃을 수 있는 지금 생각하면 참 특별하고 긴 꿈을 꾼 것 같다. 한 번뿐인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전혀 다른 곳으로 가 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하고 또래들과 원 없이 놀며 연애도 해 보고 싶다. 충분히 겪어보고 이상이 같은 사람과 만나 서로 배려하며 살고 싶다. 이 세상 인연이 끝나서 돌아갈 때 고마웠다는 인사를 남길 수 있다면 좋겠다. 남은 이에게 쓰린 아픔은 남기지 말고 아름다운 추억만 안기고 싶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여서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돌아가서 이 세상이 아름다웠노라고 추억하리라.
소중한 내 아들, 딸에게는 남겨 줄 유산도 명예도 없지만 주위의 모든 이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만 있으면 삶이 풍요로울 수 있으리란 말을 해 주고 싶다. 잡히지 않는 허상을 좇지 말고, 드높은 지위도 허무한 것이니 소박한 가운데서 참된 행복을 찾으라고 일러 주리라.
그리고 내 마지막을 하루라도 늘리려는 노력 같은 것은 못하게 다짐해 두겠다. 이생에서는 궂은날이 많았지만 내 꿈나무인 아이들이 있어서 기뻤고 행복했다. 늘 모자란 엄마였지만 아플까 걱정하고 적적할 새 없이 챙겨 주는 아이들의 넘치는 사랑이 고마워 내 인생의 마지막은 석양 노을처럼 붉게 태우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