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89]
■ 구림마을(99)

입구에서 바라본 호은정 전경. 왼쪽에는 지촌최현선생송덕비(芝村崔炫先生頌德碑)가 세워져 있다. 지촌(芝村) 최현(崔炫, 1890~1965)은 호은정을 건립한 호은 최동식(1860~1949)의 아들이다. 최현은 아버지가 지은 호은정을 구림중학교에 기증했고 구림중학교에서는 1961년부터 학교 도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정내에는 호은정에 관한 편액이 걸려있지 않지만 문헌에는 ‘호은정기’와 ‘호은선생실기’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안동인(安東人) 급우재(及愚齋) 김영한(金寧漢 1878~1950)이 쓴 호은정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김영한의 호은정기(湖隱亭記)
낭주 사람 최동식의 자(字)는 자윤(子允)이다. 낭주는 호남의 명승이고 구림은 또 낭주의 영험한 곳이다. 월산(月山)은 비단 병풍 같고 서호(西湖)는 비단 띠 같다. 맑은 기운과 광활한 모습은 사람의 마음과 눈을 탁 트이게 한다. 반듯한 들의 밭두둑은 물고기 비늘처럼 서로 교차한다. 땅은 비옥하여 늘 곡식이 여물고, 귤포(橘包)·죽전(竹箭)·해류(海榴)·동백(冬栢)을 심어서 바라보면 빙 두른 것이 천호후(千戶侯)에 맞먹는다.

최자윤(崔子允) 공(公)은 이곳에서 70여 년 동안 은거하여 유유자적 즐기고 뜻은 높았다. 호숫가에 정자 하나를 지어 호은(湖隱)이라 하고 나에게 기문을 구했다. 나는 통함과 막힘, 현달(顯達 학식이나 덕망이 높아 세상에 이름이 드러남)과 곤궁함은 실로 인정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큰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선비가 문장을 닦고 학식을 넓히며 재주를 품고 일생의 힘을 부지런히 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자 함이다. 그러나 명운과 때가 세상과 맞지 않고 나를 알아주지 않으니, 막혀서 곤궁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산꼭대기와 바닷가에 자리 잡은 소리를 죽이고 마르고 초췌한 사람이 어찌 그 마음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현달과 막힘, 통함과 막힘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이를 수 없다. 과거 시험장의 명리를 다투는 길에서 밤낮으로 몸을 수고롭게 하여 현달을 구하다 결국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늘을 탓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조급함을 탄식하여 하루라도 즐겁지 못한다. 설령, 그 바라는 바를 얻었어도 그저 치질을 핥아 수레를 얻고(비굴하고 악착같이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행위) 씨 뿌리길 구걸하여 배부름을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달이라는 것은 창피하고 부끄러워하기에 족한 것일 뿐이니, 어찌 즐겁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명운을 아는 군자는 그렇지 않다. 만사에 유유자적하고 모든 것을 하늘에서 듣는다. 순탄하게 흐르는 것과 막혀서 그치는 것은 상황을 따르며 스스로 즐거워하며 자유로이 노닐며 세상을 마친다.

그래서 위를 보든 아래를 보든 정신과 기운이 즐겁고 고요한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비록 새끼줄로 지도리를 삼고 깨진 항아리로 문을 삼으며 대그릇과 표주박으로 살림을 살며 자주 굶어도 그 즐거움이 있다. 하물며 호수와 산의 승경과 전원의 흥취를 더하고 소탈하고 멋진 건물을 지었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궁하여 은둔할 수 있고 은둔하여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공이 하는 것을 나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공이 공을 위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나는 비록 공과 교분이 없지만, 그 뜻에 공감하여 자신도 모르게 흠모하게 되었고, 게다가 내 선대(先代) 스승의 자취가 이 고을에 남아 있다. 그래서 꿈속에서라도 남쪽으로 달려오려는 마음이 오래되었다. 조만간에 길 떠날 차비를 하여 강과 산의 경관을 보러 갈 것이다. 시간이 나면 공을 따라 이 정자에 올라가 그 즐거움이 어디 있는지를 물어보고자 한다.

계유년(1933년) 2월 안동인 김영한 기록

김영한의 구림마을과 인연
김영한은 태호 조행립을 기리는 사당 서호사 중건기를 썼던 인물이다. 그는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문인인데 어떻게 구림마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그 실마리는 문곡 김수항의 영암 유배에서 찾을 수 있다. 문곡의 조부는 청음 김상헌으로 안동김씨이다. 문곡이 영암에 유배됐을 때 구림마을에서 살면서 창녕인 안용당 조경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문곡은 안용당기를 썼으며 조행립의 셋째 아들인 조경찬을 많이 존경했다. 김영한 역시 안동인으로 청음 김상헌의 13세손이고, 문곡 김수항의 11세손이다. 김영한이 ‘서호사 중건기’를 쓴 것은 창녕조씨 문중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문곡 김수항의 후손인 연유(緣由)가 크다. 이런 인연으로 선대의 발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는 구림마을에 와서 전혀 교류가 없던 호은 최동식이 지은 호은정 기문도 쓰게 된 것이다.

김영한의 생애
김영한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기오(箕五), 호는 급우재(及愚齋) 또는 동강(東江)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출신지는 충청남도 공주군 공암리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13세손으로 아버지는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김석진(金奭鎭)이며, 생부는 면천군수 김홍진(金鴻鎭)이다. 김영한은 9세 때 양부 김석진에게 입양되었다. 특히 양부 김석진은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1910년)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인물로 유명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예닐곱 살 때부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894년(17세) 식년시 진사(進士)에 합격하며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898년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1900년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으로 삭녕군수(朔寧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1901년 용인군수에 제수되어 봉직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는 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주권을 빼앗기는 상황에 대한 지식인의 비분강개한 태도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양부 김석진이 음독자진(飮毒自盡)하자, 일본이 강권한 작위와 돈을 받는 것을 불충불효(不忠不孝)라 하여 끝내 받지 않았다. 양부 김석진의 항일 순국 정신을 계승하고, 일제가 강요한 특혜를 거부하며 지조를 지킨 그는 당시 많은 지식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김영한을 중심으로 전국 유림들은 김석진의 순국을 사표로 삼아 애국운동을 펼쳤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문장가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일생을 학자로 살았다. 문집으로 ‘급우재집(及愚齋集)’이 있다.

<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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