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 벚꽃 백 리 길[185]
■ 구림마을(94)

육우당 육우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골기와 맞배지붕으로 2칸은 마루, 1칸은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육우당 대문 오른편에는 육우당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육우당 육우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골기와 맞배지붕으로 2칸은 마루, 1칸은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육우당 대문 오른편에는 육우당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육우당에 대한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함양박씨 박흡(朴洽 ? ~1593) 장군 6형제가 자란 곳으로 초창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선조대(1567~1608)로 전한다. 현재 건물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약 280년 전에 다시 건립한 것이다. 육우당(六友堂) 현판은 어린 시절 우리 지역에서 공부하여 봉래 양사언, 추사 김정희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명필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썼다. 특히 우리 지역은 한석봉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하는데 이곳은 그 유명한 한석봉과 어머니의 “글씨와 떡 썰기 시합”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며, 개성에서 태어난 한석봉이 스승 영계 신희남을 따라와 공부했다고 전해지는 덕진명 영보리 일대와 어머니가 떡장사를 한 곳으로 알려진 학산면 독천시장 등이 그곳이다. 

한석봉 어머니는 구림마을에서 살았을까?
안내판의 설명은 읽어볼수록 애매모호하다. 한석봉 어머니가 구림마을 육우당에 살면서 떡을 팔았다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된다. 한석봉 글씨가 한 점 걸려 있으면 그 집이 한석봉 일가가 살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먼저, 한석봉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기록을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가장 정확한 것은 사후에 기록된 묘비명일 것이다. 월사 이정귀가 쓴 석봉 한호의 묘갈명을 살펴보기로 한다.

월사 이정귀(李廷龜)가 쓴 한석봉 묘갈명
이정귀(1564~1635)는 조선 중기 문인으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성징, 호는 월사, 시호는 문충이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명나라를 자주 왕래하였다. 그의 문장은 장유, 이식, 신흠과 더불어 한문 사대가로 일컬어졌다. 명나라의 양지원은 호탕하고 표일하면서도 화려하지 않아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고 이정귀의 문장을 평가하였다. 시문집으로 ‘월사집’이 전한다.

석봉(石峰) 한공(韓公) 묘갈명(墓碣銘)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통정대부(贈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 행통훈대부(行通訓大夫) 가평군수(嘉平郡守) 겸(兼) 양주진관(楊州鎭管)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한공(韓公) 묘갈명(墓碣銘) : 서문을 병기함

내가 쫓겨나서 못가에 산 뒤부터 나는 항상 병을 칭하여 손님을 사양하였는데 손님 중에서 문에서 몸을 구부리고 만나기를 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를 만나보니 한석봉(韓石峯)의 아들 민정(敏政)이었다. 내가 석봉의 묘도문(墓道文)을 부탁받은 지가 이미 3년이 지났고 갑자기 고생스러워서 병이 났기도 하고 또 필묵에 게으르기도 하여 유명(幽明)을 등지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민정을 만났다. 나는 민정에게 나의 게으름을 먼저 사과하였다. 민정은 슬퍼하며 말하기를 “너무 가난하여 돌을 마련하는 것이 보석으로 시급하여 감히 전의 청을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아아, 슬프구나! 나는 처음 글자를 배우기 시작한 때부터 한석봉을 알았다. 석봉은 글씨로써 천하에 이름이 있었고 나는 글로써 헛된 명성을 훔치고 있었으니 드디어 나는 석봉과 친구가 되었다. 내가 조사(詔使)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조정에 가서 아뢰고서 그와 함께 용만(龍灣)에 머물렀다. 한 해가 지나도록 친구가 되어 막중에서 종유하는 즐거움을 누린 것이 어제와 같으니 석봉의 묘에 내 말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석봉의 행장을 살펴보니, 석봉은 이름이 호(濩)이고 자는 경홍(景洪)이며 석봉(石峯)은 그의 호이다. 5대조는 대기(大基)이니 곡산군수(谷山郡守)를 지냈다. 할아버지는 세관(世寬)이니 이때부터 송도(松都)에서 살았다. 선고는 학생(學生) 언공(彦恭)이니 송도에서 석봉을 낳았다. 

처음 공의 생일을 점치면서 말하기를 “옥토(玉兎) 생이니 동방에서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높여 놓을 것이니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쓴다는 것으로 이름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금 자라서 스스로 글씨를 익힐 수 있었는데 꿈에서 왕우군(王右軍)이 글씨를 쓴 것을 주었다고 한다. 공은 이것으로 마음속으로만 흐뭇하게 여기며 자부하여 임첩(臨帖)에 귀신의 도움이 있는 것같이 하였다. 타고난 재주가 있기도 하였고 또 노력도 쌓여서 해서, 전액, 초서가 각각 그 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향시에서 과장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니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계미년에 와서 별제(瓦署別提)를 제수받았다. 글 때문에 해가 없었으므로 자주 관직을 옮겨서 인의(引儀), 사포(司圃), 북부(北部), 사도(司䆃), 사재(司宰), 주부(主簿), 감찰(監察), 한성판관(漢城判官), 호조정랑, 형조정랑, 전부(典簿), 찬의(贊儀), 사어(司禦), 희평군수(嘉平郡守), 흡곡현령(歙谷縣令)을 역임하였고 혹은 두 번 제수받은 적도 있었다. 자주 원종공신이 되었고 공이 몰한 뒤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비(妣)는 백씨(白氏)이니 정부인(貞夫人)이었다.

석봉이 일찍이 명필로 한 시대에 이름을 날렸으므로 조정(朝廷)은 조사(詔使)를 영빈할 때나 천조(天朝)에 주청(奏請)할 때 그를 사한(詞翰)으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임신년에 원접사(遠接使) 임당(林塘) 정상(鄭相)의 행차나 임오년에 율곡선생(栗谷先生)의 행차나 신축년의 나의 행차 및 신사년과 계사년의 주청사(奏請使)의 행차에 석봉이 모두 참여하였다. 가는 곳마다 내외를 놀라게 하였다. 

천조제독(天朝提督) 이여송(李如松), 마귀북해(麻貴北海) 등계달(滕季達), 유구사(琉球使) 양찬(梁燦)이 모두 글씨를 요구하였다. 그 이후 가면 갈수록 석봉의 글씨는 천하에 두루 퍼지게 되어서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조선에 한석봉이라는 명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엄주(弇州)의 왕세정(王世貞)은 필담(筆談)으로 “석봉의 글씨를 칭찬하여 성난 사자가 돌을 파내듯하고 목마른 천리마가 냇가로 내달리는 듯하다”고 하였다. 한림(翰林)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에 와서 말하기를 “석봉의 글씨는 마땅히 왕우군(王石軍)이나 안진경(顔眞卿)과 우열을 가릴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글씨는 더욱 귀증하게 여겨져서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얻으면 수주(隋珠)와 곤옥(崑玉)을 얻은 듯이 하였다. 선왕(先王)과 금상(今上)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쓰기를 명한 것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모두 병장(屛障)과 궤안(几案)으로 작성하여 벌려놓고 아침저녁으로 감상하였다. 양궁(兩宮)에게 전후(前後)로 주었던 것이 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 어선(御膳)과 법주(法酒)가 길에서 줄을 이었다. 

선왕(先王)이 일찍이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서 감탄하여 말씀하시기를 “기이하고 씩씩하니 헤아릴 수 없구나”라고 하시고 중사(中使)를 보내서 집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 또 선왕은 한가한 고을의 수령을 제수할 것을 명하시고 그에게 훈유하시기를 “반드시 너의 글씨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필법을 후세에 전승하고자 한 것이니 시간을 여유있게 갖고 억지로 제작하지 마라. 게으르게 하지 말고 급박하게도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취한 속에 천지가 있으니 붓이 조화를 빼앗았구나(醉裡乾坤筆奪造化)”라는 8자를 어필(御筆)로 써서 하사하셨다. 공이 병이 났을 때에는 약과 의원을 계속 보내었다. 부음이 들리자 상은 부의를 하사하신 것이 대단히 후하였다. 부군(府官)에게 명하여 상장(喪葬)을 돕게 하였으니 그 은총이 넘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석봉은 계묘년에 태어나서 을묘년에 졸하였다. 향년 73세이다. 학생(學生) 최담(崔湛)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그가 곧 민정(敏政)이다. 그는 진사에 합격하였고 또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그 집안을 이었으니 승문원에 관리로 들어가서 관직을 보임하였다. 

석봉은 사람됨이 두텁고 무거웠으며 말이 적었다. 술을 잘 마셨으며 만나자마자 우두커니 자적하며 시를 짓고 글씨를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은 높은 이름을 지고서 찬사가 공경 사이에 이르렀다. 공은 마음이 관대하여 시기가 적었으니 비록 입으로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내실이 굳고 확고하여 지킴이 있었고 자기 뜻이 아니면 말을 누그러뜨려서 구차하게 합하지 않았다. 

그가 시를 지을 때에는 유독 이백(李白)을 흠모하여 왕왕 자못 풍취가 있었다. 저 선비들이 재예를 품고서 임금의 많은 은총을 받고자 한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게 되고 어떤 사람은 비난을 면치 못하여 끝내는 자신과 이름을 온전히하고 주상의 은혜를 보존하는 경우가 드물다. 일시(一時)의 공명(功名)이 불살라지는 것이 단지 모기나 등에가 지나가는 만큼이나 적은 것이니 더욱이 죽은 뒤에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석봉과 같은 사람은 초야에서 일어나 붓을 잡아서 주상이 그를 알아주었으니 권세를 다투는 자도 그의 일에 간섭할 수 없었고 헐뜯는 자도 감히 의논할 수 있는 자가 없었으니 죽을 때까지 영광을 누렸고 그의 명성이 후세에 이르렀던 것도 당연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살아서 주상의 은총으로 영광이 있었으니 귀함이 어쩌면 경에게까지 올랐네
죽어서도 썩지 않으니 누가 장수하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아아 석봉이여
너를 썩지 않게 하는 것은 이름이고
네 이름을 이름 짓는 것은 내 명(銘)이구나
만력(萬曆) 46년 무오년 월 일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정구(李廷龜)가 글을 지었고, 숭정(崇禎) 갑신년 후 73년 병신 월 일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예조참의(前行禮曹參議) 겸(兼) 지제교(知製敎) 이진검(李眞儉)이 글씨를 썼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안악군수(行安岳郡守) 유명건(兪命健)이 전액을 썼다.

<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계속>                  

 글/사진 김창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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